19세기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느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대학시절 프랑스 문학 시간에 자주 인용되었던 구절이다.
트럼프 행정명령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천둥 번개에 날벼락까지 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난민, 무슬림, 이민자, 유색인종’ 중 어느 한 범주에 드는 사람이라면 가슴의 일기가 맑을 수는 없다. 어느 정도씩은 비가 내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2주, 이어지는 반 이민 행정명령들로 이민사회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불안정하다. 입국금지 명단에 오른 무슬림 7개국 이민 커뮤니티들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합법적 비자를 가지고 입국하려던 사람들이 공항에서 되돌려 보내지고, 이미 발급되었던 10만 건의 비자가 취소되었다. 개개인의 삶의 흐름이 끊기고, 가족들은 기약 없는 생이별에 들어갔다.
‘국가안보’와 ‘미국민 일자리 지키기’ 명분으로 쏟아내는 트럼프의 반 이민 정책들이 어디까지 가지를 뻗을지 알 수가 없다. 드리머도 불안하고, 취업비자 소지자도 불안하고, 영주권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만큼 미 전국에서는 트럼프 반대시위가 거세다. 그리고 그만큼 트럼프 지지 목소리도 높다. 선거공약을 속전속결로 실행하는 트럼프의 일처리에 대단히 만족한다는 시민들, 주로 백인들이다. 지난 선거는 백인 기독교인의 선거였다. 백인들 중 복음주의 개신교도의 81%, 가톨릭교도의 60%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 인종적으로 분열되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제 세상 만난 듯 혐오범죄들을 저지르고 있다. 편견과 증오의 먹구름이 두텁다. 그런데 먹구름 너머에 햇살이 보이니 희망은 있다.
무슬림 입국금지 명령이 발표된 다음날 텍사스, 빅토리아에서는 회교사원이 전소되었다. 사원은 과거에도 증오범죄 타깃이 되었던 만큼 ‘방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인구 6만여 소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회교사원, 140명 신도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잃었다.
하지만 그들은 슬픔에 잠길 새가 없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찾아와 회당 열쇠를 건네주었다. 예배 장소로 쓰라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회 4곳도 언제든 교회 건물을 쓰라고 제안했다.
불타버린 사원을 새로 짓기 위해 85만 달러를 목표로 시작한 성금모금은 며칠 사이에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지역주민들은 “우리는 이웃”이라며 성금을 들고 찾아오고 온라인 모금 사이트에는 멀리 해외에서까지 후원이 밀려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명령이 몰고 온 멋진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슬림을 대놓고 배척하는 정책에 종교계가 더 이상은 가만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미 전국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의 2,000여 지도자들은 종파초월 이민연맹을 결성하고 난민과 무슬림 금지 명령에 대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어떤 종교이든 신앙인은 모름지기 방문자를 환영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약자 편에 서야한다”며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정책을 촉구했다. 무슬림 입국금지는 헌법에도 성서의 가르침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난민에게 등 돌리는 행위는 양립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인 만큼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무겁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데 기독교인들이 앞장 서야 효과가 크다. 반갑게도 그런 화합의 움직임이 보인다.
아칸소, 베튼빌에서는 2일 성공회 교회와 이슬람 센터가 공동의 예배당 건립에 합의했다. 한 지붕 아래 두 종교가 모여서 각자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겠다는 취지이다.
네바다, 오마하에서는 3개 신앙 이니셔티브가 진행 중이다. 유대인 컨트리클럽이었던 대지에 유대교 회당과 기독교 교회, 무슬림 사원이 나란히 들어서는 프로젝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오래 전에 이렇게 하기를 바랐지만 딴 짓 하느라 우리의 눈이 멀었었다”고 한 랍비는 말했다.
지난 며칠 전 세계의 SNS를 달군 사진이 있다. 무슬림 소녀와 유대인 소년이 해맑게 미소 짓는 장면이다. 지난 30일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무슬림 입국금지 항의시위 중 무슬림 아빠와 유대인 랍비 아빠가 마주하고, 그들의 어깨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도 마주했다. ‘사랑’ ‘공감’ ‘증오가 설 곳은 없다’는 팻말들, 그리고 다정한 미소들. 먹구름 뒤의 햇살이다. 분열과 배척의 현실을 뚫고 인간애의 햇살은 빛날 수 있다. 그렇게 희망은 자랄 수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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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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