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에는 동양미술에 없는 전통이 하나 있다, 누드 그림이다. 르네상스 이후 로마 그리스 신화가 그림의 주 소재가 되면서 여신들이 누드로 표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주인공은 미의 여신인 비너스. 이상적인 완벽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많은 화가들이 비너스를 그렸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지고의 미에 대한 숭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때 그림은 가상의 현실을 무대로 했다.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신화의 세계이다. 사람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천상, 그곳 신들의 이야기인 만큼 관람자는 누드 앞에서 거북해하지 않았다. 누드 여신의 빛나는 몸을 미의 상징으로 찬탄하는 것이 감상의 기본자세였다.
‘신화’라는 장치 안에 들어감으로써 누드는 부끄러워해야 할 ‘벗은 몸’이 아니라 ‘미의 상징’으로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수세기 이어오던 이런 의식의 틀이 19세기 후반 공격을 받았다. 신화의 베일을 확 걷어 젖히고, 그림의 무대를 천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린 사건이 발생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 가 1865년 파리 살롱전에 전시되자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림에 대한 고전적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파격적 소재와 파격적 기법, 파격적 메시지에 관람자들은 당황했다.
전통적 비너스의 구도를 차용하면서 여신 대신 매춘부를 등장시킨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다. 천상이 아닌 파리의 아파트에 보통 여자가 벌거벗고 누워있는 그림을 보며 사람들은 불쾌하고 불편했다. 고상해야할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파리는 급작스런 도시화의 물결로 빈부 격차가 극심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었다. 돈 있는 남성들은 창녀 애인 두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마네는 그림에 고급 창녀를 비너스로 등장시킴으로써 그 사회의 위선과 도덕적 부패상을 폭로했다. 신화로 포장되지 않은 적나라한 현실의 누드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네의 도발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정신은 19세기 후반 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면서 인상파를 비롯한 근대회화의 시대를 열었다.
150 여년이 지난 지금 마네의 ‘올랭피아’가 또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에는 한국이 무대이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화가들이 국회에서 시국풍자 전시회를 하면서 ‘올랭피아’ 패러디 작품을 내놓았다. 박 대통령이 올랭피아와 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모습이니 누가 봐도 민망하기는 하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단체들은 국가원수를 모독했다며 격노하고, 반대 진영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작가를 옹호한다. 그 한옆에서 여성 정치인들과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이자 여성 정치인에 대한 혐오 표출이라며 분개한다.
작가가 여성을 모독하거나 성적 대상화할 의도로 이번 작품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패러디 누드를 보면서 관능적이라고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에 취한 듯 누워있는 박 대통령, 주사기 다발을 든 최순실, 뒤 배경의 세월호 등 작품은 많은 국민들이 답답해하는 현 국정마비 사태를 풍자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반발만 사고 말았다.
작가가 대중적 정서를 조금만 고려했다면, 그래서 누드 위에 이불 한 자락 덮어줬다면, 풍자와 비판을 겸한 좋은 패러디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어야 민주주의는 작동된다. 표현의 자유는 예술의 생명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통념이나 어떤 고정관념, 정치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표출함으로써 예술은 발전해왔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좋은 예이다.
반면 한국판 ‘올랭피아’ 패러디는 풍자 대상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너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정을 자제 없이 너무 설익게 표출함으로써 비판 대상에 대한 동정론만 키워준 결과를 낳았다.
표현의 자유는 옹호되어야 하지만 조건이 따른다, 건전한 양식과 자기 절제이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풍자는 특히 자제해야 한다. 2년 전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한 예이다.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풍자만화를 즐겨 싣던 이 잡지사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습격해 12명을 처형하듯 죽였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말이 실현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다. 하지만 ‘풍자’까지이다.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조롱이나 모독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도 품격을 갖춰야 가치가 산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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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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