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였다. 새해 계획으로 독서를 꼽는 이들이 많았다. 읽고 싶은 책으로 누군가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꼽았다. 자히르(Zahir)는 아랍어로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물 혹은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나의 자히르는 뭘까”로 이어졌다. “아이들 독립할 때까지는 자식?”“그러다가 아이 결혼하고 나면 손주?” 하며 웃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집착하는 세태를 말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것도 한몫할 테고 가전제품 덕에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자히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 사로잡힌 상태 또는 열정을 말하므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다시 말해 생의 추동력이 되는 동시에 강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어떤 일에 사로잡혀 열정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글이 자히르라 말할 수 있을까. 글 쓰는 일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고 열정과 집착과 강박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자히르를 받아들여 내 안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자히르마저 벗어놓고 자유로워야 하는 시점을 의식하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캐나다로 이민온 후 지난 몇 년 열정을 갖고 글에 몰두하게 된 것이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움의 근원은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그리움.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 때는 막연한 추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언어로 표출되자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나며 욱신거렸다. 언어는 무뎌지는 영혼을 간헐적으로나마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가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나를 깨어있게 했고 살아있게 했다.
비록 찌르듯 날카로운 아픔이라 해도 황혼의 나이에 자극 받을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활력이었다. 문학이라는 가시를 품고 피 흘리는 영혼으로 살 수 있다면, 죽음 앞에서도 마르지 않는 붉은 피 가득한 혈관이라면, 싶었다.
열정에 사로잡혀 몰입하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차안대(遮眼帶)를 한 말처럼 옆을 가리고 앞만 보며 달리면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지에만 몰입한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는 무관심하다는 뜻도 된다. 사람은 말과는 달리 외곬으로 나아가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워 사회라는 거대한 물줄기에서 소외될 수 있다. 사회적인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삶에서는, 차안대를 하고 독주하기보다 함께 걷는 ‘관계’가 더 소중할지 모른다.
새해가 밝은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새해 결심이 이미 작심삼일이 되었을 수도 있고 열정적으로 이루는 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잣대로 규정된 성취나 성공을 위해 서두르거나 초조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자히르라는 안대’를 벗고 천천히 걸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이타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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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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