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정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 그곳에서 아래를 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곳에 여러분들과 같이 가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달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산정 연설’(I‘ve Been to the Mountaintop) 마지막 부분이다. 1968년 4월3일, 그가 이 땅에서 한 마지막 연설이다. 목사로서 그가 신앙의 비전으로 본 ‘약속의 땅’은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그의 평생의 꿈이 실현되는 세상이다.
‘자명한 진실’은 당시로서 ‘불온한’ 꿈이었다. 불온한 만큼 꿈은 절실했다. 불온한 만큼 대가도 컸다. 다음날인 4월4일 그는 39살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 있는 걸까. 그 땅의 입구에 이정표 하나 확실하게 세웠다고 감격한 것이 8년 전인데, 지금은 이정표의 존재가 가물가물하다. 노예의 나라에서 흑인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인종차별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줄 알았는데, 2017년 미국에서 인종은 다시 예민한 이슈로 떠올랐다. 인종적 편견을 훈장처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가 도래했다.
킹 목사는 ‘산정’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을 본 게 아닐까. 곧게 전진하지 않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본 게 아닐까. 역사 속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지난 2009년 1월20일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4년이나 8년에 한번 오는 단순한 정권이양이 아니었다. 미국 역사의 물줄기가 새롭게 방향을 트는 이정표적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보려고 수백만명이 워싱턴 D.C.로 몰려들었다. 금융위기가 닥쳐 어려웠던 시기에 특히 흑인들은 카드빚을 내서 온 가족이 취임식 행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오바마의 취임은 여러 역사적 연결고리들로 이어지면서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우선 그해 마틴 루터 킹 기념일은 1월19일, 대통령 취임식 전날이었다. 킹 목사의 꿈이 육신이 되는 듯 기념일 바로 다음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해는 또 노예해방의 주역인 링컨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선거 중이던 2008년 오바마는 8월28일에 민주당 후보지명을 수락했다.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워싱턴 대행진 45주년 기념일에 맞춘 것이었다. 워싱턴 대행진은 킹 목사가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추진한 행사였다. 노예해방 100년 후 흑인민권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다음 45년 후 흑인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8년, 감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미국, ‘백인의 나라’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백인 표를 끌어 모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방 상하원 역시 공화당이 차지했다. 소수인종과 이민자들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 좁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서 ‘오바마 8년’의 결과물이다. 이 사회의 소수계들을 끌어안으려 애쓴 오바마의 노력이 반작용을 불러왔다. 서류미비자, 동성애자 등 소외집단 포용정책을 펴면서 오바마는 소수계,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고학력 백인 특히 여성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다.
여기에 반발한 집단이 중소도시와 시골의 백인, 블루칼라, 나이든 세대, 보수적 기독교인들. 이들의 소외감을 트럼프가 가장 선동적으로 활용한 것이 지난 대선의 결과이다.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미국사회의 수면 아래에는 항상 인종적 편견이 깊은 늪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멕시칸, 무슬림, 이민자에 대해 막말을 하면 표가 모인다는 사실을 트럼프는 알고 있었다. 인종차별의 뿌리는 그만큼 깊다.
킹 목사는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류의 진보는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정의라는 목표를 향한 한 단계 한 단계가 희생이고 고통이고 싸움이다.”킹 기념일과 트럼프 취임을 앞두고 이민단체, 유색인종 단체, 여성단체들이 대대적 행진/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8년 전 오바마 취임 때의 축제 분위기와는 아주 다르다.
역사의 작용-반작용에 기대를 건다. 트럼프 집권이 ‘약속의 땅’으로 확실하게 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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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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