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는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인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의 교전으로 시작된 미국 독립전쟁이 격화하면서 1776년 7월 4일 미국이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자 그는 영국 국회의원 중에서는 드물게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나선다.
그 후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혁명이 터지자 열렬히 이를 지지했던 토머스 페인은 당연히 버크도 같은 입장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자를 통해 미국 독립에 불을 당긴 인물이다.
그러나 버크의 생각은 달랐다. ‘대표권 없는 과세’를 인정하지 않는 ‘타고난 영국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 미국 혁명과는 달리 이성의 힘에 의지해 과거와의 전통을 모두 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프랑스 혁명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헤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은 그의 보수주의 정치 철학을 천명한 고전이다.
근대 이후 보수와 진보 논쟁의 시작은 버크와 페인이 그 기원이다. 유발 레빈이 쓴 ‘위대한 논쟁’(Great Debate)은 이들 논쟁의 전모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그 영향을 깊이 있게 기술하고 있다.
부패한 왕정의 압제에 저항해 프랑스 민중이 들고 일어나자 당시 유럽의 대다수 진보적 지식인은 이를 지지했다. 영국의 대표적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그 새벽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고/ 젊었다는 것은 천국이었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 지도부는 곧 단두대를 세우고 혁명의 적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슬로 사라진 것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같은 구체제 인물만이 아니었다. 조르주 당통 같은 혁명 지도자를 비롯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트완 라브와지에 같은 천재 과학자들까지 기요틴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마침내는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목숨을 잃고 나서야 테러는 멈췄다.
혁명 지도부가 자멸한 공백을 메운 것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질서는 회복했으나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그 후 1815년 워털루 전투 패배로 퇴출될 때까지 수십 년 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발간 직후 지식인들의 조롱의 대상이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은 나폴레옹 이후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됐다. 누구보다 먼저 버크는 이 책에서 쫓겨난 왕의 목을 칠 경우 찾아올 것은 평화와 번영이 아니라 극심한 혼란과 독재밖에는 없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영국이 150년 전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들은 1649년 의회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중과세를 부과하고 압제를 일삼은 영국 왕 찰스 1세를 잡아 도끼로 목을 쳤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전권을 장악한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 정치였다. 10년간 그의 폭정에 시달린 영국 국민들은 그가 죽자마자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모셔다 다시 왕으로 삼았다. 수십 년에 걸친 내란과 독재의 결과가 결국 왕정 복귀라는 사실은 못난 왕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국민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줬다.
예나 지금이나 진보주의자들은 이성의 힘으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점진적 개혁보다 혁명을 통해 일거에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기를 좋아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은 이성만이 아니라 관습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며 이를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의 개혁도 오직 점진적으로만 가능하며 급격한 혁명은 부작용만 불러 온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위시해 러시아 혁명, 문화 혁명 등 수많은 혁명들이 피만 많이 흘리고 애초에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에서는 요즘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이 떨어져 나와 개혁 보수 신당을 만든다고 한다. 한국의 보수 정당은 지난 수십 년 간 집권했지만 이렇다 할 보수의 철학이란 것을 내놓은 적이 없다. 새 정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버크와 레빈을 일독하고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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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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