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1901-1908)
이Taft-Katsura Memorandum 에는 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일본간에 불화가 있음이 지적 되었고 일본측은 조선의 자주주권을 인정하면 조선이 외국들과 협약을 맺어서 외교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됨으로 일본이 조선을 합방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일본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상호양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 상대방의 식민지 정책에 간섭하지 말자고 상호 양해한 것이다. 어쩌면 이 문서에는 러시아를 경계하고 일본과 친하고자 하였었다는 Teddy 의 속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을사보호조약 이 1905년 11월 17일에 조선에 강요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 Memorandum 과 인연이 있는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래에 적는 일화는 그 진위, 정확성 등에 대한 논쟁도 있고 일화의 중요성에 대한 해석도 개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즉 이무렵 이승만 박사가 루즈벨트를 면담한 적이 있었다는데 면담의 절차, 내용, 성과 등에 대한 평가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2011년 8월 21일자에 한겨례신문이 당시의 미국 신문기사들을 보고 분석해본 결론은 “이박사가 고종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루즈벨트대통령을 만난 것이 아니고 밀서는 전달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3년에 처음으로 93명의 농업이민을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보냈다.
대한제국에서 7년이상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하와이에 온 이박사는 그곳의 윤봉구 목사와 함께 하와이 미국 감리교 감독의 주선으로 당시 아시아 로 가다가 하와이 에 들렸던 미국 전쟁부장관 Taft 로 부터 이, 윤 양씨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받았었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 동포들이 “미국은 1882년의 체결된 한미수호 조약에 따라 일본의 침범으로부터 대한제국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라는 청원서에 4천명의 서명을 받아서 Taft 에게 주었었다고 한다.
이박사는 “고종황제는 국민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 다소 친일적인 성분도 있었다는일진회 에 속했다는데, 대한제국에서 아무런 공식적인 위임을 받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박사와 윤목사는 Taft 의 소개서를 들고가서 1905년 8월 4일에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사가모어힐의 별장에서 운이좋게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 하였는데 러시아 대사가 와서 면담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 시간이 없었던 Teddy 가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서 서류를 미국 국무성으로 제출하라” 고 한 말을 듣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워싱턴으로 가서 김윤정 공사대리 에게 그간의 경위를 얘기하자 김공사는 서류를 작성해서 다음날 가지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에 공사관을 통해서 충정공 민영환이 여비 300달러를 보내 주었다고 하는데 , 후일 그가 망국의 한을 품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박사는 삼일간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국을 배반하고 일본과 밀통하여 변질이 되어있던 김공사는 흑인 경비원에게 다음날 이, 윤 두사람을 들여보내지도 말라고 지시를 해놓아서 다음날 두사람은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공사관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받고 아무 서류도 전달하지 못한 채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김윤정공사는 후일 왜정치하에서 충북지사를 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족반역자 였다고 한다.
한국내에서는 위와 같은 한겨례신문의 결론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 이승만의 고종 밀사설” 은 진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것 같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그때 이박사가 Teddy 에게고종의 밀서이던 아니면 다른 어떤 청원서를 전달 했었더라도 대한제국의 국운에는 별 변동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 되는 점이다.
당시 미국과 Teddy 는 일본을 실세 이상으로 강국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아시아에 세력을 늘려가려 하던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저지세력으로 일본을 이용하려고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국운은 거래상 흥정거리로 치부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이무렵 미국이 일본을 두려워었다는증거가 있다. 1907년에 Teddy 는 미국 해군함정 28척이 한꺼번에 세계일주를 하고 오게하였는데 이 엄청난 비용이 드는작전은 전 세계에 미국의 해군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특별히 일본을 의중에 두고 행한 해군력 과시였다고 한다. “목소리는 작게, 몽둥이는 크게!” 라고 Teddy 가 즐겨쓰던 아프리카의 격언을 또 한번 실천해본 것이었다.
Teddy 는 “Gunboat Diplomacy” 를 효과적으로 잘 쓰던 대통령이었다. Teddy 가 대통령같은 호전적인 움직임은모든 지역의 개방이라는 미국의 국제정책에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미국은 아시아 까지 가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일본이 미국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러시아에 맞서서 만주공략을 하려 들었고 드디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슬그머니 일본편을 들고 나섰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러시아나 일본 중 약한 편을 도와주어서 두 나라가 계속 상호 견제를 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고 중국의 독립유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러일전쟁때 해군함정들 3분의2가 침몰 당했다는 러시아 가 패망하기 전에 미국이 개입 하여 양국대표를 뉴햄프셔 주의 Portsmouth 에 오게 한 후 1905년8월에 Teddy 의 중재하에 평화협정을 맺게하였는데 그 공로로 Teddy 는 미국 대통령중 유일 하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Teddy 는 꿩도 먹고 알까지 먹은 셈이 되었지만 날벼락은 멍충이처럼 옆에서서 구경만 하고 있던 우리나라에 떨어졌다. 미국은 일본을 평화협정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일본이 조선을 합방해도 묵인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그대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진출 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평화협정을 맺도록 해놓고는 구전까지 받아 먹었던 것이다.
이 상호약속을 성문화 시킨 것인 Root-Takahira Agreement 라는 조약이 1908년에 맺어졌는데 그 2년 후인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듯 싶다. Teddy 는 외교협상에 능란했던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일본사람들은 하와이에 많이 이민해서 살고 있었는데, 캘리포니아로 농업이민이 대거 몰려들어오자 백인들은 위협을 느끼기시작하여 지역출신 연방 상하원의원들에게 일본이민을 중단시키라고 요구 하였다.
캘리포니아 지역 국회의원들의 일본이민 중지압박에 몹시 시달려오던 Teddy 는 “일본이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시키겠다” 는 조항을 Root-Takahia Agreement 에 슬그머니 집어 넣었다. 나중에 일본에서는 이 조항이 치욕적인 것이었다고 큰 말썽이 났다고 하는데 Teddy 는 이 조약에서도 꿩 먹고 알까지 먹은 셈이 되었다.
조선 사람의 입장으로는 Theodore 루즈벨트 대통령을 “xx놈”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우리는 그가 “조선의 대통령”이 아니고미국의 대통령임을 기억해야 한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것이 앞으로도 국제정치의 기본원리로 존속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운명을 우리손으로 결정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 이때에 일어난 일들이 꼭 미국이 우리를 팔아 먹었던 탓이라기 보다는 이미 진행되고있던 사태를 미국이 묵인 했던 것 뿐이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우리도 Theodore 루즈벨트 같은 대통령을 한번 가져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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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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