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냈다. 마침내 승리했다. 불의한 권력이 분노한 시민에 의해 합법적으로 해체됐다. 대한민국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총 투표 299명 가운데 찬성 234명 반대 56명이라는 압도적 표결로 가결한 것이다.
희열감이 넘쳐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이와 함께 다시 촛불이 일제히 켜졌다. 축제의 촛불이다. 돌멩이 하나 던지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명예혁명을 이뤄냈다. 그 시민 혁명을 축하하는 촛불축제가 열린 것이다. “2016년 12월 9일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한 이정표를 이룬 날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시민이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자랑스러운 외침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탄핵안이 가결된 ‘12.9 상황’을 바라보는 국내 시각이다. 미국언론도 같은 시각이다. 그러나 다소 다르다. 경이로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할까. 세계적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를 관통하는 2016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격노(rage)’라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진단이다. 분노가 쌓여간다. 그 출발 시점은 2008년이다. 월스트리트의 붕괴와 함께 일기 시작한 분노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적으로 만연, 2016년은 격노의 해가 됐다는 것이다.
대중의 분노는 정치, 사회적 대변화를 몰고 왔다. ‘브렉시티’ 주민발의 안을 가결시킨 영국,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이 그 대표적 사례로 만연한 분노감은 지구촌 곳곳에서 국민저항을 불러오고 있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한국의 정치상황도 월스트리트저널은 같은 시각으로 해석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미국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 그리고 그에 따라 한층 거세진 국민저항이란 세계적 흐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분노가 쌓일 대로 쌓였다. 경제가 엉망이다. 게다가 불평등 구조는 심화되고 있다.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논쟁에서 보듯이. 대통령은 불통으로 일관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이다. 그런 정황에서 불거진 것이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비리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아니, 치욕감에 치를 떨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 격노감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 이런 면에서 월 스트리트 저널의 진단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빠졌다. 격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격노의 감정 해소접근방법에서 상당한 차별성을 보여 왔다는 사실 말이다.
“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사상 가장 세련된 민주적 행동으로 몰아냈다. 이것이 서구 민주주의와는 다른 발전된 새로운 우리의 민주주의 모습이다.” 한국의 한 무명의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정말이지 기적 같이 보였다. 주말마다 수백만의 인파가 모였다. 그것도 여섯 차례나. 그런데 사고 한 건 없이 평화롭게 시위가 진행됐다. 평화적 시위야말로 불의한 권력을 무너트리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알고, 또 체득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형 촛불시위가 보이고 있는 그 성숙함, 여유로움 가운데에서 무엇인가가 감지된다. 새로운 희망이랄까, 가능성이랄까 하는 것이다. 뭘까. ‘민주주의 한류’라는 다소 생소해 보이는 담론이다.
역시 한 무명의 네티즌이 사진을 올렸다. 단체관광차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촛불시위행렬에 가담한 모습이다. 왜. 중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다. 그 광장민주주의의 현장이 너무 신기하고 또 가슴에 와 닿아서다. 그리고 ‘나도 그 시위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 그 사진을 본 중국 네티즌들의 글이다.
한류의 가장 중요한 콘텐츠는 자유와 민주주의다. 한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이룩한 유일한 나라다. 그 한국 사회의 역동성, 그리고 민주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 한류 콘텐츠에 중국인 등 동아시아인들은 열광하고 있다.
다른 말이 아니다. 한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기반 한 보편적 정체성을 부지부식 간에 동아시아인들에게 심어온 것이다. 그 한류의 콘텐츠가 그런데 대중문화라는 분야에 제한돼 있었다. 촛불시위는 그 한류의 콘텐츠를 업그레이드 시키고 또 확산시킬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새로운 희망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2010년 12월. 튀니지의 한 과일 행상 청년이 독재정권의 횡포에 항의하며 분신해 숨졌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튀니지는 물론 전 아랍세계에 반정부 시위물결이 몰아쳤다. ‘민주주의 한류’ 확산과 함께 그와 방불한 사태가 ‘혹시 중국에서, 또…’-. 지나친 희망적 사고인지 모르겠지만“이제 한류의 최고 콘텐츠는 민주주의다.” ‘12.9 한국 민주주의 승리의 날’을 맞아 한 네티즌이 던진 화두다. 포스트 탄핵의 상황. 단기적으로는 어렵다. 그렇지만 한 무명의 대한민국 시민이 보인 그 당당한 자신감에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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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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