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안은 가결되었다. 변수 많아 어디로 튈지 모르던 탄핵의 공은 국회를 통과해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지만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보안손님’이 그림자처럼 드나들 뿐, 그러잖아도 찾는 사람 없는 청와대 관저에서 그는 무덤 속 같은 침묵의 무게를 견뎌내야 할 것이다. 12년 전 똑같은 유폐생활을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산보 외에 할 일이 없다’며 답답해했는데, 박 대통령은 어떨까. 혼자 사는 데 익숙하니 견딜만할까. ‘부덕’의 소치 일뿐 “내가 뭘 그리 잘못 했나”하며 배신감을 곱씹을까.
광장을 불태우던 촛불 민심이 결국 일을 해냈다. 탄핵의 연료는 시민들의 분노, 뿌리 깊은 분노의 에너지였다. 표 계산하고 정치적 이해득실 따지느라 꼼수 부리고 우왕좌왕하던 여야 정치인들은 성난 시민들이 여의도로까지 몰려들자 탄핵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미적거리다가는 자신의 정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탄핵안은 가결정족수(200)를 34표나 넘어서며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다. 여당 표가 떼로 몰려들었다. 시민들이 가만있었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가히 ‘촛불 혁명’이다.
민주국가에서 정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법에 근거해 통치되는 나라이다. 국민 각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 도무지 주인 같지 않고, ‘법치’는 교과서에나 있을 뿐 현실은 연줄이거나 돈일 때 국민들은 좌절한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포기하다가 냉소가 사회를 온통 뒤덮을 때 최순실 사태는 터졌다.
주권자로서 대통령에게 위탁한 권력을 근본도 없는 사람들이 마구 휘두른 어처구니없는 사태 앞에서 시민들은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했다. 비선 실세라는 자들 앞에서 지성인이라는 교수들은 절절 매고, 콧대 높은 고위 공직자들은 수행비서 노릇을 하고, 재벌들도 두 말 못했다는 사실, 그러면서 끼리끼리 배를 불렸다는 사실 앞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연일 타오르고, 그럼에도 대통령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여야 정치인들은 주판알 튕기느라 이랬다저랬다 하고 … 도무지 ‘뭣이 중헌지’ 모르는 정치권을 밀어붙인 것은 시민들이었다. ‘탄핵’은 민심의 압박이 이뤄낸 성과이다.
촛불 혁명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불확실성으로 앞이 안 보인다. 탄핵안 부결 시 몰아쳤을 분노의 후폭풍은 면했지만, 무주공산에서 벌어질 혼란을 가늠하기 어렵다.
정치권은 지금 어떤 형국일까.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대권 앞에서 조바심에 잠 못 이루는 인물도 있을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얼기설기 담합을 꾀하는 인물들도 있을 것이다. 간판스타는 식물인간이 되고 비주류가 득세한 여당은 조만간 간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노회한 정치 엘리트들 간의 타협과 이합집산이 2017년을 어지럽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정치권이 갈라지고 그에 따라 촛불 민심도 갈라진다면 ‘혁명’은 물 건너간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최소한 광장의 시민들만큼만 성숙해졌으면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신뢰 회복이다. 정치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권력 안에 안주할 욕심에 사적인 이해와 당리당략만 쫓을 뿐, 무능에 무소신에 무책임한 존재들이라고 싸잡아 비난 받고 있다. 이미지 쇄신이 시급하다. 국민 두려워하는 마음 자세가 그 시작이다. 이번 촛불의 힘을 보았다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촛불 혁명이 대한민국의 새 시대를 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촛불 혁명의 판을 만들어준 것이 될 것이다. 산업화를 거치고 민주화를 거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제왕적 대통령과 정경유착이다. 이번에는 넘어서야 하겠다. 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권력이 주어진 것이 박근혜의 비극이었다.
촛불이 ‘혁명’을 마치고 어서 빨리 집안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촛불이 언제까지 찬바람 부는 광장을 메워야 하는가.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촛불은 식탁 위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가족들이 아늑한 촛불 아래서 행복한 꿈을 꾸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박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었던 국민이 행복하고, 국민의 꿈이 이루어지는 시대는 차기 정권에서나 기대할 수 있겠다. 박 대통령에게 국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헌재 결정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민심이 모두 돌아선 마당에 무슨 기대가 남아있는가. 빨리 물러나야 덜 초라해진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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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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