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지 어느 덧 30년이 넘었으니 그동안에 겪었던 크고 작은 문화충격이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생각나는 일이 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몇 과목을 수강했었는데, 아마도 미국사 시간이었던 것 같다. 책상 위에 책을 펴놓고 자고 있던 한 학생이 깨어나는가 싶더니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선생에게 묻는 말이 “지금 어딜 하고 있는 건가요?”였다.
내게 더 놀라웠던 것은 그 학생의 질문에 아무도 키득거리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생도 진지한 얼굴로 지금 교과서 몇 페이지의 어느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때 얼굴이 화끈거렸던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던 것 같았다.
똑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졌더라면 어땠을까. 그처럼 용감한(?) 학생도 찾아보기 힘들겠거니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교실은 대번에 웃음바다가 되고 선생은 아마도 화를 내며 들고 있던 분필을 내던지지나 않았을까(요즘의 한국교실에서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아, 이런 분위기 정말 부럽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는구나”하며 “나도 모르면 당당하게 질문을 하자”라고 다짐했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잘 하지 못했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탓도 크지만, 원래 성격이 한국말로도 남 앞에서 자기주장을 잘 못하는 편이다. 말보다는 차라리 글로 쓰는 편이 더 편한데, 아마도 글은 여러 번 곱씹고 다듬을 수 있어 실수할 확률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실수가 두려워 공개석상에서 자기표현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요즘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강원국 씨이다. 그는 나처럼 말하기나 발표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한국의 교육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은 듣기와 읽기 위주로 이루어져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남의 아이디어나 생각을 순식간에 따라잡기는 쉬워도 자신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발전시킨 것도 이같은 교육 덕분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창의성은 자기표현 연습이나 기회를 통해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표현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생각만 한 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안에다 쌓아놓는 일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풋’과 ‘아웃풋’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 건강하다는 것인데,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쓰는 이의 평정심과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어디다 발표를 하는 글이 아니어도, 일기나 간단한 메모 형태의 기록일지라도 이를 통해 우리는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고 자신과 주변을 성찰할 수 있다.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은 외부의 도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고민상담을 위해 찾아가는 카운슬러는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단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자신을 돌아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더욱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이고 샤핑이다 뭐다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만 암울한 시간들이 펼쳐지는 것 같아서이다. 혹시라도 이런 느낌이 있다면 지난 1년을 버텨온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도록 권하고 싶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다 보면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용기, 이웃들의 도움 그리고 신의 가호가 생각날 지도 모를 일이다.
말로든 글로든, 사람은 자기 안의 것을 밖으로 표출하며 살아야 한다. 카드나 연하장, 혹은 이메일에 의례적인 인사대신 한해를 보낸 솔직한 소회라도 담아 보내면 어떨까.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나를 드러내 보이면 스스로가 치유될 뿐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도 더 건강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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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 로타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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