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의 주도, 세일럼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사건 하나를 알고 있다. 지난 3년 여 동안 계속 진행되어온 사건, 지역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쁜 ‘기적’의 이야기이다.
시작은 지난 2013년 봄이었다. 보이스카웃 소년들이 기금모금을 위해 팝콘이며 초컬릿 같은 걸 팔고 있는데, 한 신사가 와서 팝콘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는 차곡차곡 접은 지폐 한 장을 놓고 사라졌다. 나중에 소년들이 지폐를 펴보니 100달러짜리였다. 신사는 이어 두 번이나 다시 와서 초컬릿 몇 개를 사고 지폐를 두고 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두고 간 지폐가 9장, 900달러였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큰돈을 기부한 신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보이스카웃 단원의 부모들이었다. 세일럼의 유일한 일간지, 스테이츠먼 저널에 그의 선행을 제보하고, 그가 기부한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스카웃 단원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칼럼니스트가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신사를 소개했다.
칼럼니스트는 이름 없는 신사에게 ‘베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100달러 지폐의 얼굴인 벤자민(프랭클린)의 애칭이다. 그런데 한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베니의 기부는 계속 이어졌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월마트나 타겟 그리고 지역 수퍼마켓 등지에서 4등분해 접은 100달러 지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돈은 주로 시리얼이나 기저귀, 화장지 등 생활필수품 박스 안에 들어있다.
지폐를 발견한 시민들은 칼럼니스트에게 연락을 하고, 그들의 사연이 보도되기를 반복한 지 3년여. 그동안 시민들에게 나눠진 돈은 5만 달러가 넘는다. 베니는 이제 세일럼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 하지만 여전히 정체불명의 수수께끼 인물이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1년쯤 전 우연히 ‘베니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이따금 진전 상황을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의미’이다.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줌으로써 그가 얻는 것은 삶의 의미일 것 같다. 흔적도 없이 쓰여질 수 있는 돈이 그들의 기쁨으로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의 삶 자체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사람은 의미로 사는 존재이다. 소유는 당장의 달콤함을 제공하지만 거기까지, 근원적 목마름을 해소하지 못한다. 많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서 목이 타들어간다. 탐욕이 탐욕을 부른다. 반면 의미 있는 삶은 소유의 차원을 넘어선다. 삶의 중심축이 소유에서 존재 자체로 넘어간다. 많이 갖고 적게 갖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으니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소유는 줄어드는 데 기쁨은 오히려 커지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의미는 삶을 승화시킨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달 착륙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였다. 1962년 연방우주항공국을 방문 중 어느 청소부와 마주쳤다. 그때 청소부가 한 말이 두고두고 전해진다.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인간이 달에 가도록 돕는 일을 합니다.”그가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자 그의 삶은 쓰레기 치우는 차원에서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차원으로 승격했다.
베니의 무작위 나눔이 시작된 후 인구 10여 만명 작은 도시에서는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첫째는 생활고로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이 희망을 얻게 되는 기적. 지폐는 용케도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갔다.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비며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혼반지까지 저당 잡힌 한 부인은 반지 찾을 돈을 얻게 되었다. 노숙자로 살던 한 부부는 지난 성탄시즌 베니의 지폐로 모처럼 모텔 잠을 잘 수 있었다.
둘째는 나눔이 나눔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릴레이. 나눔 바이러스이다. 베니 지폐를 통해 어려운 사람들의 어려운 사연이 알려지자 ‘나도 돕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앞의 부인의 반지를 맡았던 전당포는 반지를 그냥 내어주고, 부부에게는 성금이 쇄도했다.
그런가 하면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은 베니 지폐를 그냥 두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돈을 합쳐 비영리기구나 불우이웃에 기부를 하고 있다. 세일럼은 예쁜 기적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의미는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생겨난다. 인간은 연결된 존재,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아서는 삶에서 의미를 찾기 어렵다. 타자를 돌아보고 그들을 품어 안는 데서 삶은 의미를 갖는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 않는 배경이다. 울타리를 넓혀 더 많은 이웃들을 품어 안는다면 삶의 의미는 더 깊어질 것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한해를 마무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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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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