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에 물을 붓고 열을 가하면 물의 온도가 올라간다. 그리고는 섭씨 100도가 되면 물은 끓기 시작한다. 물의 내부로부터 기화가 일어나 보글보글 기포가 생긴다. 액체인 물이 기체로 물질의 상태가 변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비등점이다.
단, 섭씨 100도에서 1도만 모자라도 물은 끓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끓기 시작한 물은 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액체가 모두 기체가 되어 날아가 버릴 때까지 기어이 끓는다.
역사에도 비등점이 있다.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강고한 흐름이 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급선회하는 기적 같은 시점/지점이 있다. 그렇게 흐름이 바뀌고 나면 새로운 방향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정상’으로 굳어지고, 이전의 낡은 체제는 아득해진다. 비등점 이전에 기체인 물을 상상할 수 없고, 비등점 이후에 액체인 수증기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매주 줄기차게 광화문광장을 메우는 촛불의 바다를 보며 ‘비등점’을 생각한다. 민심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것 같다. 부정한 정권에 대한 분노, 부정의 정도에 대한 경악, 부정의 수준에 대한 당혹 그래서 허탈하고 참담한 심정들이 촛불을 상징삼아 ‘광장’으로 밀려들고 있다.
유모차를 끈 엄마들, 가족 동반한 아빠들, 연인들, 친구들, 어린 학생들, 남녀노소 혼참족들(혼자 참여하는 사람)의 인산인해를 보며, 그리고 분노를 축제로 승화시킨 성숙한 시민정신을 보며 부드러움이 오히려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비폭력 저항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항거하는 대신, 비폭력 시위로 체제의 폭력성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비등점’에 오른 것이 미국의 민권운동이다. 일명 ‘버밍햄 어린이 십자군’ 운동이다,반세기 전인 1963년 앨러배머, 버밍햄의 흑인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버밍햄은 미국 남부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도시, 흑인 교회나 집에 툭하면 다이너마이트가 투척돼 바밍햄(Bombingham)이라고 불렸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흑인 지도자들이 4월 버밍햄을 방문해 흑인들을 결집시키려다 그대로 체포되었다.
민권운동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시위에 참가하면 체포되거나 목숨을 잃는 엄혹한 상황에서 흑인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가장으로서 우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때 남부기독교 지도자회의에서 조심스럽게 나온 아이디어가 ‘어린이 시위’였다. 아이들이 나서면 경찰이 잔혹하게 막지는 못하리라, 강경진압을 한다면 여론이 가만있지 않으라는 계산이었다.
반대도 많았다.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린다는 것이었다. 킹 목사 역시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결국은 ‘버밍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로 아이들의 시위를 독려했다. 5월2일부터 수천의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리게는 6살짜리부터 중고생이 주를 이뤘다. 많은 아이들이 체포되었지만 다음날 아이들은 다시 물밀듯 거리로 나왔다.
버밍햄 경찰당국은 물 대포와 경찰견,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진압했다. 아이들이 맞고 쓰러지고 다치고 연행되는 장면은 미 전국의 신문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미 국민들은 경악했다. 민권운동에 대한 지지 여론은 급물살을 타며 확산되었다.
버밍햄 어린이 십자군 행진으로 여론은 끓어오르고, 8월 워싱턴 대행진으로 이어졌다. 20만명이 참가한 대행진에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하면서 미국의 수백년 인종차별은, 법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행진 직후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부통령이 킹 목사 등 흑인 지도자들을 만나고, 이듬해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노예국가 미국이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사회로 법과 의식의 기본 틀이 바뀌었다.
광화문광장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비폭력, 평화로움이다. 대한민국은 시위의 나라, 툭하면 촛불집회인데 그래서 달라진 게 뭐 있느냐는 비판의 소리도 없지 않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 수없이 불을 붙이고 바람 불어 꺼지고 다시 붙이는 동안 이만큼 성숙해진 게 아닐까.
화염병 쇠파이프 챙겨 들고 최루탄 자욱한 거리로 비장하게 나서던 폭력시위의 시대는 저물고, 부모가 아이들 손잡고 나오는 시위, 시위대가 경찰의 안전을 염려하는 시위, 경찰이 시위참가자에게 길을 안내하는 시위, 주변 빌딩 식당 카페들이 시위대에게 화장실을 개방하는 시위 … 그런 성숙한 시위의 시대가 열렸다. ‘광장’은 민주주의 실현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광장은 촛불로 끓어오르고 시민들의 의식은 변화의 비등점에 다다랐다. ‘박정희 신화’는 막을 내렸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 도도한 흐름을 누가 이끌 것인가. 킹 목사 같은 지도자가 안 보여서 불안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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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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