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저 빨간 감처럼 철이 들 수밖에는”이라는 노래 시처럼 가을에 철이 드는 건 단풍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젊어선 태양이 뜨거운 바다가 좋았는데 이젠 단풍 은은한 가을에 심산에 가고 싶다.
단풍이 아름다운 건 잎새에 묻어난 연륜 때문일 것이다. 여린 잎들은 설푸를 뿐이지만 단풍엔 온 생애가 녹아있다. 앵두처럼 붉기 도하고, 노릿노릿 익은 옥수수 빛이거나, 포도보다 농익은 자줏 빛 삶의 자취. 단풍잎엔 철든 인생의 족적이 묻어있다.
고모님이 구순을 바라보신다. 납북당한 내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형제시다. 뉴욕 맨하탄 건너 루즈벨트 섬의 단아한 노인아파트에 홀로 사신지 근 20년 째.오 늘은 우리 부부, 큰 아들 내외와 두 살배기 손주까지 고모님을 뵈러간다. 아들이 사는 이스트 60가에서 루즈벨트 섬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퀸즈보로 철교를 지나면서 굽이치는 이스트강에 떠 있는 긴 섬이 보인다. 세계의 용광로 같이 펄펄 끓는 맨하탄을 바로 곁에 두고도 이 나지막한 섬은 은둔자의 뒷 뜰처럼 평온하다. 약간 치매를 앓으시는데도 다행히 고모님은 나를 알아보셨다.
“고맙다. 네 손자까지 함께 왔으니 4대가 모였구나.” 고모님의 미소가 햇살처럼 빛났다. 가문의 소중한 유산이란 피붙이 정의 대물림일 것이다. 6.25 전쟁 통에 삼팔선을 넘어오신 고모님도 망백(望百)노인이 되어 맨하탄의 단풍아래서 두 살배기 4대째 피붙이와 만난 것이다.
섬에서 바라보는 맨하탄의 풍경은 스탠리 쿠브릭스의 흑백사진처럼 구도가 강렬하고 선명하다. 대리석 빛 유엔 빌딩과 그 뒤에 정렬한 높고 낮은 마천루들이 거센 흡입력으로 주위의 에너지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다. 옛 로마제국보다 더 강렬하고 웅장한 미국의 모습.
섬의 맨 끝 삼각지에 최근 착공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유공원에 들어섰다. 추모공원은 희디 흰 화강암 보도 곁에 세워진 청동 두상과 두 줄로 늘어선 카퍼비치 나무들이 전부다. 극도의 절제미가 경건함과 결연함을 자아낸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미국민과 세계 인류가 누려야할 4가지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에서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 부터의 자유.
돌아보면 나는 꼭 40년 전, 빈곤과 결핍에서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셈이다. 풍요롭고 너그러운 미국은 우리 같이 가난한 동양의 이민자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고, 내 자식들도 책임 있는 민주의식을 소유한 시민으로 키워주었다. 그리고 약하고 연로하신 고모님도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올 가을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루즈벨트 자유선언이 선포된 지 75년 만에 미국의 자유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너그러운 미국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다시 추방과 배척의 공포에 떠는 도가니로 변하고 있다. 관용을 버리고 적대를, 배려 대신 분열로 기울고 있다. 과연 미국의 자유주의가 붕괴되는 서막인가? 역사의 가을은 성숙해 가지 않고 쇠망해 갈 뿐인가?착잡한 마음으로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넜다. 얼마를 달리니 단풍이 불타는 산 숲길로 접어든다. 김영랑의 시구가 절로 나온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아버님과 고모님은 어린 시절 감잎 단풍아래서 오누이를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제 천수를 누리시고 떠날 차비를 하시는 고모님이 단풍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의 염록소도 화려했던 꽃들도 튼실했던 열매도 자손들에게 다 물려주고 훌훌 떠나신다. 단풍처럼 다 주고 떠나는 사랑의 모습.
역사가 아무리 철없이 굴어도, 이 맑은 가을 하늘아래 단풍을 바라보는 인간은 철들 수 밖에 없다. 정치가 아무리 요동친다 해도 단풍은 포용과 희생의 징표로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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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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