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는 것만으로 치유… 생명평화운동의 시발점
▶ 금계~동강 구간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의 다랑논을 배경으로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있다. 함 양 =< 최흥수기자>
그 길엔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이렇다 할 즐길 거리가 있는 것도아니다. 추수가 끝나가는 다랑논을 배경으로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유난히 해가 짧은 산골 마을에 저녁 연기가 피어 오르는 풍경을 볼 수 있을뿐이다.
이따금씩 가을걷이에 무심한 농부들을 만나고, 편하다고만 할 수 없는 산길을 걸을 뿐이다. 편의시설이라곤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벤치 몇 개가 전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이 길을 걷는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무와 바위와 이끼에까지 눈길을 주고,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물소리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끝내 얕은 언덕을 넘는 바람까지 가슴으로 느껴보려 애쓴다. 그렇게 서너시간 걷고 나면 어느새 마음 한 켠에 고요와 평화가 깃든다. 개인적인 상처 못지않은 상실의 시대, 지리산둘레길은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길이다.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의 모태,금계~동강 구간
지리산둘레길(이하 둘레길)은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함양 산청하동 등 지리산 주변 3개도 5개시군285km를 연결한 걷기길이다. 2000년대 초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지리산권역의 4개 종단 성직자들이‘생명과 평화’를 기원하며 순례를 하던 발걸음이 시작이었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지리산댐과 케이블카건설 문제가 불거지던 시기였다. 여기에 지리산 생명연대를 비롯한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만들어 보자고 나섰고, 마침내 2012년 둘레길이 완성됐다. 도로건설로 이용하지 않게 된 묵은 길을 되살리고, 국립공원구역은 침범하지 않는다는 게 대원칙이었다.
둘레길 22개 구간 중 금계~동강구간은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에서휴천면 동강마을까지 연결된다. 이구간도 용유담으로 바로 가는 코스(11.1km)와 서암정사, 벽송사를 둘러가는 코스(12.7km)로 나뉜다.
용유담 코스는 의중마을을 지나 엄천강을 왼편에 두고 내내 산허리를걷는다. 호젓한 숲길이기 때문에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약 3km를 걸으면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엄천강을 만난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모여든 물줄기가 잠시 쉬어가는 곳, 용이 노닐다 승천할 만한 곳이라는 용유담이다. 자연호수 주변 닳고 닳은 바위에는 용 대신 수많은 묵객이 풍류를 즐긴 흔적이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엄천강의 짙푸른 물빛에 산 그림자와 단풍이 비쳐 잔잔한 물결이 한층 청아하다.
이곳부터 둘레길은 본격적으로 마을과 마을로 연결된다. 동강마을까지 전 구간이 포장길이기 때문에 한여름 땡볕은 부담스럽고 오히려 요즈음 걷기에 적당하다. 엄천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협곡에 가까운 가파른 산비탈로 다닥다닥 논밭이 이어지고, 길은 그 중턱으로 연결 돼 있다. 고단함으로 일궈낸 그 풍경에 눈이 아리다.
바로 이 구간이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된 댐 건설 예정지다. 국토교통부에서 계획한 댐은 높이가 140m로 국내 최고, 길이는 870m로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저수용량에 비해 터무니 없이 큰 것도 문제지만, 용유담을 비롯해 둘레길이 지나는 마천면 일대는 물론이고,남원 산내면의 실상사 코앞까지 물에잠길 터였다.
종교계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이어지자 국토부는 다목적댐에서 홍수조절용댐으로 변경해 홍수가 예상될 때만 담수를 할 예정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신강 지리산생명연대 운영위원은 그런 댐이 왜 필요하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댐을 위한 댐이라는 지적이다. 다행히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 정부도 의지를 꺾었지만, 경상남도는 식수확보를 위해 다목적댐을 건설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용유담과 엄천강의 용틀임을 언제까지 볼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같은 사찰 다른 느낌, 벽송사와 서암정사
의중마을에서 벽송사로 연결되는코스는 칠선계곡을 따라 지속적으로 오르막이어서 용유담코스에 비해 한결 힘들다. 벽송사 바로 아래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원응스님이 재건해 한뿌리로 볼 수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다르다.
서암정사는 1989년부터 불사를 시작했으니 역사로만 보면 최신식 사찰이다. 그런데도 자그만 암자를 연상시키는 이름과 달리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적지 않다. 주차장에서부터 별나다 싶을 정도로 ‘정숙’을 강조하는안내문이 많은데, 경내로 들어서면이유를 조금은 눈치챌 수 있다.
입구부터 용틀임 조각에 한자로 법문을 새긴 커다란 대리석이 인상적이다. 바로 옆에는 자연석에 그대로 새긴 사천왕상이 버티고 있다. 역시 바위 통로를 활용한 사천왕문을 지나면 붉은 기운을 띤 황금빛 대웅전이나오고 마당을 지나면 굴법당이다.
이름대로 바위 굴 내부 자연석에 불상을 조각해 법당으로 활용한 특이한 구조다. 대웅전 뒤편 산신각까지사찰 전체가 잘 꾸민 조각공원을 보는 듯해 마음이 살짝 들뜬다.
경건함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암정사의 창건 목적 때문이기도 하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사용했고, 그로인해 국군에 의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사찰이 바로 서암정사다.
벽송사는 조선중종(재 위1506~1544년) 때 창건했지만 현재건물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 지었다.
그럼에도 깊은 산중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모습은 천년고찰 못지않은 기운을 풍긴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불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만한 고승들이 수련하고 연을 맺은 곳이니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유래했을 정도로 한국 선불교의 종가임을 자부하는 사찰이다.
뒤편 언덕에는 도인송과 미인송으로 이름 붙인 잘생긴 소나무 두 그루가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서면 넉넉한 절터 뒤로 맞은편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벽송사 입구에는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2개의 나무장승(목장승)을 전각에 보존하고 있다.
이 목장승에 기원하면 부부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찰 측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에 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둘레길은 목장승 전각 옆에서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금계~동강 코스전체로 보면 단풍이 많지 않은데 이곳만은 유난히 발갛게 물오른 단풍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용유담과 모전마을 가을 풍경.
잘생긴 도인송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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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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