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베니스 콜마 중세 숨결 곳곳에
▶ 프레드릭 비솔디 박물관, 자유의 여신상 조각가 생애 한눈에
바솔디 박물관
다뉴브강 시작하는 블랙 포레스트 수려한 경관의 독일 알프스
7박8일 여정 끝자락 스위스 바젤 시내 관광하며 마무리
프랑스 작가 조지 두하멜 (George Duhamel)은 “콜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1931년 그의 친구에게 글을 쓴 일이 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에게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 그룹은 성마틴성당(Saint Martin Cathedral) 에 들어가 내부를 보았다. 1235년에서 1365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고딕건축양식의 성당이다. 그리고 올드타운이라고 불리는 옛 타운으로 향했다. 라인강으로 흘러가는 Lauch 강의 운하들이 많은 것이 베니스와 같다고 하여 “작은 베니스(Little Venice)”라고도 칭한다. 스트라스보그의 “작은 파리(Little Paris)”처럼 이곳 “작은 베니스”에도 중세의 여러 건축양식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바솔디 박물관 (Bartholdi Museum)이다. 이 박물관은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하고 제작한 프레드릭 바솔디(Frederic Bartholdi)가 1832년에 태어난 곳이다. 15세기에 주택으로 건축되었으며 18세기에 개조되어 지금은 Bartholdi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을 가장 많이 전시한 박물관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국민들에게 준 선물이다. 그는 미국을 직접 방문하여 뉴욕 정치인들과 대통령을 만나 자유의 여신상을 건립하도록 설득하였다. 여신상을 제작하여 미국까지 운반하는 것은 프랑스가 담당하지만 건립비는 미국에서 부담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뉴욕 주지사는 건립에 반대하고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 의회도 협조하지 않았다. 총공사비 $100,000 충당이 어려워 건축이 시작되지 않았다. 보스턴 등 다른 시에서는 건립을 원했지만 Bartholdi는 뉴욕에 세우기를 원했다.
뉴욕의 일간지 New York World (1931년 폐간)의 발행인 Joseph Pulitzer가 발벗고 나섰다. 자유의 여신상 건립기금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그 이름을 New York World 신문에 발표하겠다고 공약했다. 신문은 100만을 초과하는 구독자를 가진 미국 최대의 신문이었다. World는 1885년 8월 11일 총모금액 $102,000을 발표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총 120,000명이 참여하였다. 대부분 1달러 짜리가 대부분이었으며 40센트, 50센트 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886년 10월 28일 드디어 봉헌식이 개최되었다. 이날 봉헌식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행사에 부인과 함께 참여한 Bartholdi는 인사말을 하도록 사회자가 요청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한손에 횃불을 치켜들고 한손에는 법전을 쥐고 있는 자유를 상징하는 로마여신상이다. 동으로 된 동상 높이만 46m, 기초에서 횃불까지 91m이다. 얼굴 길이가 5.26m, 넓이가 3.05m,코의 길이가 1.46m가 되는 거대한 상이다.
퓰리처는 17세에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태인이다.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하였으며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으나 곧 기자로 변신했다. 국회의원, 신문 발행인, 자선사업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언론과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미국의 최초의 신문대학원인 콜롬비아 언론대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미주리대학 언론대학원 설립을 도왔다. 언론, 문학,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권위 있는 퓰리처상은 콜롬비아대학이 퓰리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이다.
바솔디박물관을 끝으로 오후 12시 반에 배로 돌아왔다. 점심 후 오후 2시 Black Forest의 입구까지 가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약 4시간의 관광스케줄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언덕위에 세워진 타운들을 지나면서 때로는 언덕위에 버스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계속해서 야생초와 야생화로 물결을 이루는 언덕과 들판을 버스는 지나간다. 포도농장으로 수놓은 마을들을 만난다. 뻐꾸기시계 생산으로 유명한 마을에 들렸다. 다양한 뻐꾸기시계의 모형들이 있다. 뻐꾸기시계는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나 Black Forest가 원산지라고 한다.
Black Forest는 독일의 알프스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길이 160km 넓이 60km의 넓은 지역에 많은 강과 호수들이 있고 각종의 옥외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라 4계절 모두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배가 정박한 라인강 상류에서 Black Forest입구까지는 자동차로 4-50분 거리다.
매년 Black Forest에 하루 이상을 머무는 관광객은 3천500만 명에 가깝다. 2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여러 타운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관광산업이 주산업인 이 지역에 140,000명의 관광산업과 관련된 종사원들이 있다. 유럽 9개국을 횡단하는 다뉴브 강이 이곳애서 시작하여 흑해로 들어간다.
오후 6시에 배로 다시 귀환했다. 이날 저녁은 “석별의 만찬( Farewell Dinner)라고 했다. 특별한 음식이나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여행의 종착지인 스위스 바젤에 도착하면 7박 8일의 크루즈 여행이 끝난다. 그래서 이날 저녁이 마지막 저녁이라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저녁 식사 후 아내와 나는 라운지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약간의 시간을 보냈다. 라운지에는 저녁마다 Stefan이란 중년 남자가 피아노를 쳤다. 나도 여러 차례 갔기 때문에 마지막 밤 라운지를 나오면서 감사의 표시로 유로 $10을 주고 ‘Thank you very much’란 인사말을 받았다.
제8일 5월 7일 (토)
■스위스 바젤 (Basel)
1962년 TIME지 표지로 선정된 칼 바스 신학교수
아침 6시에 갑판으로 올라가니 배는 이미 정박하고 있었다. 독일 Breisach에서 스위스 바젤까지는 약 70km 지점이다. 배는 바젤 도착 전 3km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정박했다. 바젤까지 도착하지 않은 이유는 몰랐지만 바젤 정박시설 공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든 승객은 아침 9시까지 하선하도록 일정에 나와 있었다.
크루즈 직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선박측은 행선지 시간에 따라 순서대로 승객들을 바젤까지 대려다 주고 있었다. 모든 승객들은 짐을 선실 밖으로 내어 놓아야했다. 짐에 8가지의 각각 다른 색깔의 표를 붙이도로 되어있다. 세벽 4시에 배에서 출발하는 승객은 전날 자정까지 짐을 선실밖에 내놓도록 했다. 나는 그린색 리본을 짐에 매달고 아침 7시 30분 선실 밖으로 내 놓았다. 8시 30분 버스로 바젤로 향했다. 크루즈측이 주선한 호텔에 승객들이 내리고 이곳에서 각자 행동을 하도록 했다. 아내와 나는 바젤시를 관광하기로 하여 호텔 라비에 짐을 마꼈다. 7박 8일간의 바이킹 크루즈의 라인강 여행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택시로 바젤시내로 향했다. 스위스에 와본 일은 있지만 바젤은 처음이다. 시내구경도 원했지만 관심이 있었던 곳은 바젤대학이다. 바젤은 스위스, 프랑스, 독일이 만나는 곳이다. 라인강 항행이 가능한 최초의 지점이다. BC 5세기에 있었던 곳으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며 40여개의 박물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다. 시 인구는 20만명 내외지만 주위의 여러 타운들을 합하면 메트로는 80만이 넘는 스위스에서 쮜리히와 제네바 다음으로 큰 도시다.
1640년에 설립된 바젤대학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세계 100대 유명한 대학 중의 하나이다. 바젤대학 본관 캠퍼스 시내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신학부다. 신학부는 대학 본부와 떨어진 옛 건물들이 있는 곳에 있다. 신학부 건물 건너편에 1640년 최초의 대학건물이 있다. 토요일이라 신학부 건물과 최초대학건물 정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신학부를 보기 원했던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로 불리는 칼 바스 (Karl Barth,1886-1968) 목사가 가르친 곳이기 때문이다.
칼 바스는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 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표시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바르멘 선언이다.
바르멘 선언은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친 나치적인 독일 교회에 반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모여서 발표한 반 나치 신학선언이다.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 밖으로 영구추방 당하여 고향 스위스 바젤로 와 바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이성으로 판단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가르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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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 빛과 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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