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나타는 국제정치에는 “정의,” “성전,” “은혜” 등과 같은 개념은 구호에 그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고 차라리 나라들은 장기나 단기간의 자국의 이해타산을 위해서 국제정치를 해왔었던 것 같다. 영원한 적국이나 영원한 우방은 없었던 듯하다. 오늘날의 중국과 미국의 불편한 관계를 보고 있자면 미국이 중국의 소멸을 막아준 “은인” 나라임을 중국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 듯 하지만 미국도 자국의 무역통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취했던 조치로써 미국이 딱히 “정의스러운” 나라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이Hawaii 와 Philippines 등의 해외영토를 획득하여 나가려고 하던 때인 1894, 5년의 청일전쟁에서 중국(청나라)이 패전하자 중국은 국가멸망의 위기에 이르렀다. 불란서, 독일, 러시아, 일본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의 주권을 사실상 박탈하려 하며 중국을 4개국의 “영향권”으로 분할하였다. 4개국은 자국의 영향권 안에서 중국이 자국민들에게 철도와 광산권 등을 장기 임대하도록 강요 하였다. 미국 무역상들이 거대한 중국시장이 4개국에 의하여 독식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4개국의 독식”에서 빠져있던 영국도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좌시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미국 William McKinley 대통령하의 John Hayes 국무장관은 영.불.독.러.일 등 5개국에 동일한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었다. 이 외교문서에는 아래와 같은 강력한 요청들이 적혀 있었다.
1.이미 개항된 22개의 항구에는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가 항구를 자유롭게 쓰는 것을 제한 할 수 없다.
2.중국의 정상적인 관세징수에 어느나라도 간섭할 수 없다.
3.어느 나라도 자국의 영향권내에서 외국의 통상을 차별하여 철도나 항구의 사용을 제한할수 없으며 사용료를 인상할 수 없다.
4.모든 나라들은 중국네에서 동등한 통상조건으로 상업거래를 할 권리를 갖는다.
미국의 위와같은 “강력한 요청”을 받은 열강들은 미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답신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외교문서들을 보내면서 열강들의 호의적인 동의가 오리라고 예정을 하지 않았던 Hayes 국무장관은 1900년 3월 20일에 열강들의 “동의가 최종적이며 분명한 것” 으로 간주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미국은 중국의 개항이 미국의 통상에 미칠 영향을 충분하게 검토해보지 못한 채로 슬그머니 그러나 깊히 국제무역과 국제정치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적인 도전은 중국의 계속적인 독립보장 이라는 “정의스러운” 부산물을 낳았다.
한편 부패하고 무능했던 황제의 통치로 나라가 망해가고 있던 동안에 중국에서는 구국을 위한 애국단체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Boxer Rebellion 이라고 불리우는 이 구국운동을 위해서 Righteous and Harmonious Fists 라는 애국단체가 결성 되었다. 드디어 1900년 5월에 이들은 중국정규군과 합세하여 “외국악마들” 을 중국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외국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북경에 있던 외국인 거주지역들을 포위하였다.
긴급히 출병된 미.영.불.독.러.일 6개국의 연합군이 Boxer 반동을 진압하는 데에 56일이 걸렸다. 당시 이 “진압군대”들의 난동도 극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증거가 남아 있다. 필자가 북경을 관광하였을때 자금성이었다고 기억되는 황제의 집무실로 쓰였다는 건물 밖의 네 귀퉁이에는 두껍게 금박을 한 향로처럼 보이는 아주 큰 소방용 물항아리가 있는데 진압군들이 칼로 금박을 깎아 가느라고 벗겨낸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은 지금도 그 칼자국을 관광객들이 보고 가도록 남겨놓고 설명문까지 옆에 세워두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참전국들은 Boxer Rebellion 과 같은 반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정부를 전복하고 중국을 참전국들이 분할하여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Hayes 국무장관은 중국의 주권은 존속되고 모든 항구들은 통상에 개방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정부를 전복하는 대신에 중국정부가 Boxer Rebellion 의 주동자들을 처벌하고 참전국들에게 중국이 3억3천4백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제안을 해서 참전국들의 합의를 얻어냈다.
미국은 미국에 할당된 2,400만 달러 중에서 실제 전비로 소모된 1,200만 달러만 받고 나머지 1,200만 달러는 중국에 반환하였다. 엄청난 손해배상때문에 곤경을 치루고 있던 중국은 미국의 “공평함과 우호” 에 감명되어 반환된 1,200만 달러로 신탁기금을 설립한 뒤 그후 중국이 매년 수백 명의 유학생을 미국의 대학교들에 유학시키는데 썼다고 한다.
이제 미국은 유럽, 아프리카, Caribbean Island 에다가 아시아지역으로 통상과 교류를 넓혀 나가고 국제 외교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 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로 우리나라가 독립된 후 우리가 36년 간의 일본의 식민착취를 연일 성토해 오고 있을 때에 “친일성분인사들”로 보아야할 일부사람들은 “만일 그때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양 어느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고 서양나라의 착취가 일본의 착취보다 더 악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던 일들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계속 되었던 영국의 남아프리카등의 식민통치 실상을 보면 식민통치의 잔학성은 동서양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일본대신에 우리나라가 서양 어느나라의 식민지가 되었을 수도 있었음은 거의 분명 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가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기 조금 전인 1900년 후 우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화 실상이 어떠했던 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은 지금의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인도, 남부일부를 제외한 지금의 버마 전역, 뱅골만의 큰섬들, 홍콩, 중국 산동성의 북부지역 등을 소유하고 있었고 불란서는Viet Nam, Cambodia, Laos 등이 포함되는 Indochina 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포함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본은 사할린제도, 조선, 만주의 동남부 지역과 대만 등을 소유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몽고북쪽의 지역과 만주의 동북쪽을 지배하고 있었다.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해온 지역들도 있었다.
러시아는 만주전체를 영향력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대만에 가까운 중국 남동쪽의 Fukien 성까지를 영향력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은 동쪽에 있는 산동성의 남반부를 영향력 지역으로 생각하였으며 영국의 영향력 지역은 서쪽으로는 Tibet, Nepal, Bhutan 지역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상해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였으며 불란서는 Indochina 북쪽과 동북쪽에 있는 중국땅들을 영향력 지대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Hunan 성, 광동성,해남도등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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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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