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말기에 태어나 박정희 시절 학교를 다니다 군대 갔다 오고 전두환 시절부터 오래 기자생활을 해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건국절’이라는 단어가 이명박 시절 뜬금없이 ‘뉴 라이트’라는 우익세력 인사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진영싸움을 부추기고 여론을 갈라놓는 분열적 이슈가 돼 버렸다. 뉴 라이트의 주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정권이 1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건국절을 아예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했다.
해방 60여년이 지나 건국절 얘기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더니 뉴 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보수언론이 똘똘 뭉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따지려면 우선 사실관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48년 정부수립일 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30년 8월15일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뉴 라이트가 그토록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승만 조차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 4월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의 이런 언급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으니 말이다. 임시정부 기록에도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현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다. 현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만으로도 정부수립일이 건국일이라는 주장은 허구요 억지라는 게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건국’의 의미다. 건국은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 우리나라가 단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배웠다. 그래서 매년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해 사실상의 ‘건국절’로 기념해 오고 있다.
임시정부는 이런 역사적 사실의 엄중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건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당시 자료들에 나오는 ‘건국 4천년’이라는 기록은 이런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 또한 ‘건국’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했다.
많은 나라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신들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왜곡과 조작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은 기원전 660년에 즉위한 진무 천왕부터 지금까지 2,600년 넘게 한 부계혈통이 일본을 다스려왔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내세워 자신들의 역사가 유구함을 주장하고 있다. 남들은 없는 것까지 만들어내 역사를 늘리려 하는데, 뉴 라이트와 우익은 있는 역사까지 잘라내면서 이상한 건국절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난데없이 이런 이상한 주장이 튀어 나온 배경에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친일세력의 ‘역사세탁’이 그것이다. 해방 이전의 역사를 부정해야 친일선조들의 죄과를 어느 정도 감추고 건국의 공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뉴 라이트 학자들이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 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추종자들임을 감안하면 쉬 이해가 갈 것이다. 역사학계가 이 논란을 ‘역사’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은 두산이다. ‘두산상회’라는 이름으로 그룹이 시작된 것은 1950년이지만 두산은 120년 전인 1896년 종로에 문을 연 ‘박승직 상점’이라는 조그마한 가게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뿌리로 본다. 일개 그룹만도 못한 역사의식을 보이고 있는 권력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마침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던 1919년 ‘대한민국’ 명의로 일본천황에게 요구사항을 보낸 영어 공식문서가 지난 주말 공개됐다. 이 문서의 공개를 계기로 몰역사적이고 몰염치한 건국절 논란에 종지부가 찍히게 되길 바란다. 이승만도 아니라는데, 뉴 라이트가 계속 1948년 8월15일에 ‘건국’됐다고 우기는 건 자신들이 숭모하는 ‘그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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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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