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애제자 자공이 정치가 무엇인지를 스승에게 물었다. 공자의 답은 간단했다. ‘식량, 군사,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외침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며, 백성들이 신뢰를 갖게 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했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부득이하여 셋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군사를 버려라.” 제자는 또 물었다. “나머지 둘 중에서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스승은 말했다. “식량을 버려라.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경제도 국방도 국민의 신뢰가 있고 나서 가능하다는 이 말을 말 그대로 실천한 동시대인이 있었다. 기원전 500년 즈음인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진 이탈리아 반도의 발레리우스라는 인물이었다.
기원전 509년 로마는 공화정으로 접어들었다. 왕이 통치하던 시대는 끝나고 시민들이 투표로 뽑은 집정관 2명이 다스리는 공화국이 되었다. 발레리우스는 그 때 뽑힌 집정관 중 한명이었는데 엄청난 부자인 그에게 어느 순간부터 의혹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언덕 위의 왕궁 같은 저택이며 여러 행보로 볼 때 그가 집정관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려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그는 주저 없이 일꾼들을 동원해 저택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는 땅값이 싼 성벽 근처에 검소한 집을 짓고 항상 문을 열어두었다. 누구든 언제든지 들어와서 그가 사는 모습을 보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국고를 집정관이 관리하게 하던 법을 고쳐 집정관은 국가재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심의 가지들을 깨끗이 잘라 버렸다.
시민들의 신뢰는 깊어지고, 그는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을 얻으며 네 번이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음 달로 다가왔다. 지난 26일의 첫 후보토론으로 분위기가 고조된 데다 시간적으로 30여일 남고 보니 선거가 큰 이슈이다. 대선의 해에 선거가 이슈인 것은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선거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슈이다. 투표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어 골치 아픈 이슈이다.
투표를 하자니 표를 주고 싶은 후보가 없고, 투표를 안 하자니 엉뚱한 후보의 당선을 돕는 꼴이 될까 두려운 것이 많은 유권자들의 고민이다. 공자가 말한 정치의 근간인 신뢰, 발레리우스가 행동으로 얻은 신뢰감을 민주 공화 후보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자꾸 감추려드는 듯해서 믿음이 안가는 후보와 대놓고 거짓말을 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후보가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2016년 대선의 이런 답답한 분위기를 30일 USA 투데이의 사설이 잘 보여주었다. USA 투데이는 34년 역사 동안 대선에서 특정후보를 공식지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전통을 깨트린다며 “트럼프는 대통령직에 맞지 않다”고 선언했다. 능력으로 엇비슷한 그러나 이념적 차이가 큰 두 후보 중 한사람을 택하던 이전의 선거와 금년 선거는 다르다는 것이다. 트럼프에게는 자질의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15개월 전 경선 출마선언 후 20개 주요 이슈에 대해 말 바꾸기를 124번이나 할 정도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데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이 ‘도저히 수습 불가’라고 할 정도로 외교정책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고, 멕시칸이나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극심한 편견에, 세금보고도 공개하지 않는 등 재산이나 비즈니스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막말 언동에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이런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설은 조목조목 짚었다.
그렇다고 클린턴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솔직하지 못하고, 기밀정보를 극도로 조심성 없이 다룬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그러니 각자의 신념에 따라 투표하되,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만은 막아야 하니 클린턴에게 투표하는 것이 타당한 대안일 것 같다고 사설은 결론지었다.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덕목으로 보통 6가지가 꼽힌다. 숨김이 없는 정직성,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도덕성, 추진력 있게 통솔하는 자신감,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돕는 동정심 그리고 타협하며 합의점을 찾는 유연성이다. 이런 덕목을 모두 갖춘 ‘완벽한 후보’가 올해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해가 동쪽에서 뜨듯 확고한 사실은 클린턴과 트럼프 중 한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다. 성에 차지 않는다고 투표를 안해도 될 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는 게 아니다. 유권자들의 고민은 길고도 깊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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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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