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시청건물 앞 스피노자 동상 인상적
▶ 항거박물관, 2차대전 당시 나치에 항거한 각종 자료 전시
무덤 위에 세운 올드처치. 교회 밑에는 12,000명의 시체가 묻혀 있다
올드처치 교회 바닥 밑에는 12,000명의 시체 묻혀 있어
매춘 합법화된 암스테르담 홍등가는 남녀 모두 찾는 관광지
■올드처치(Oude Kertk)
앤 프랑크 박물관에서 관람시간은 1시간30분 정도였다. 관람 후 박물관 2층에 있는 커피숍에 들려서 투나 샌드위치와 커피 잔을 놓고 점심을 보냈다. 점심 후 아내와 약속시간이 되어 밖에서 서성거리다 보니 아내와 안내원이 도착했다. 시내를 구경하기로 하고 먼저 간 곳이 올드 처치다. 유럽의 도시를 방문하면 가장 큰 규모요 가장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 성당이다.
이 성당의 규모는 거대하지는 않지만 1213년에 시작하여 1306년에 완공되어 90여년 만에 완공되었고 또 오래된 교회라 이름도 올드 처치다. 천주교 성당으로 건축되었으나 1578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이곳 교회 바닥 밑에는 12,000명의 시체가 묻혀 있으며 바닥은 2,500개 묻힌 사람들의 비석으로 깔려 있다. 유럽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인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 비석도 바닥에 있으며 음악가 요한 바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이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 스윌린크 (Sweelinck) 비석도 이곳에 있다.
네덜란드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국가이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3분의2가 개신교인이었으며 3분의1이 가톨릭교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세속적인 사회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신.구교 합해서 40% 정도이나 대부분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종교는 무슬림교로 전 인구의 약 5%가 된다.
■미술, 철학, 문학의 전통
다음으로 간 곳이 암스테르담 시청이다. 시청건물은 특이한 것이 없는 평범한 정부청사다. 그 앞에는 스피노자의 상이 세워져 있었다. 네덜란드는 미술, 철학, 문학의 전통이 많은 나라다. 화가로는 17세기 화가 렘브란트(Rembrandt)와 19세기의 화가 빈센트 고호가 대표적이다. 역시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를 배출한 나라답다. 유태인 출신으로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에서 살았으며 말년을 헤이그에서 보냈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생활이 어려워 안경알을 깎는 직업을 가졌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이란 명구를 남긴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는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활동하여 네덜란드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르네상스시대 인도주의자요 가톨릭 신부인 에라무스(Erasmus)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이다.
가톨릭의 남용과 부패에 대하여 비판하고 마틴 루터와 같은 시기에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사람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신앙에는 의견을 달리하고 그와 거리를 두었던 유명한 종교개혁 신학자다. 신부이며 학자이기도 한 그는 고전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홍등가
관광안내원은 암스테르담에 오면 홍등가를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유명한 관광지로 남녀 모두가 즐겨 찾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도 안내원을 따라 나섰다. 대낮에 찾은 곳은 시내 번화가 부근에 발렌가(De Wallen)다. 이곳은 홍등가로는 가장 오래된 지역이며 가장 큰 곳이다. 늦은 오후부터라야 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오후 2시경에 도착했을 때 관광객들이 적지는 않았다.
이곳에는 성을 매매하는 여자들이 렌트한 한 칸짜리 방이 300여개가 있다. 이들의 방은 말 그대로 모두가 붉은 등으로 밝혀져 있다. 밖에서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된 방안에서 야한 옷차림의 반나체로 손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팔 수 있는 커피숍들도 이곳에 있다. 이곳에 암스테르담 강의 양쪽 지역을 잇는 작은 다리가 1270년에 세워졌다. 항구가 가까워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하여 들어오고 윤락여성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세부터 시작된 이 업은 여러 차례 불법, 합법의 줄다리기에서 2000년에 다시 합법화되었다.
네덜란드에서 매춘은 합법화 되었지만 거리에는 나설 수 없다. 최근에 영업을 할 수 있는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늘렸다. 허가제로서 본인이 사업체처럼 허가를 받고 세금도 납부해야한다. 그리고 유럽공동체국가의 국민들만이 영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 나라의 남성과 결혼한 경우는 허용된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동유럽 여성들이다. 낮이라 대부분의 방들이 커튼이 쳐있었지만 띄엄띄엄 붉은 불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곳도 있었다. 체격별로 구분되어 작은 체구, 중간체구, 큰 체구의 여성들이 있는 세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작은 체구 여자들이 있는 곳만 지나갔다.
세계에서 신장이 큰 국민이 네덜란드인이라는 말을 우리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 이날 새벽 호텔 앞에 있는 공원에서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한 여성을 보고 놀랐다. 6척이 넘어 보이는 큰 체구에 높은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이런 거구의 여자가 반나체로 서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인은 사회적으로 서로 용인하는 오랜 전통이 있으며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국가다. 그래서 마약을 합법화하고 안락사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동성결혼을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항거박물관 (Dutch Resistance Museum)
사람들이 줄 서 있는 항거박물관
홍등가를 떠나 다음에 간 곳은 네덜란드 항거박물관이었다. 안내원은 자신이 17년 동안 암스테르담에 살았어도 이 박물관이 있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1940년 5월 14일부터 1945년 5월 5일까지 나치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나치 점령당시 네덜란드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나치정부에 항거했다.
박물관 건물은 1876년에 유태인 음악소사이어티에서 건립한 건물로 오랫동안 유태인의 회당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크지 않은 3층 건물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든 것은 1999년이다. 이곳은 나치에 항거하는 동맹파업, 문서조작, 잠적과 도피, 무장저항, 그리고 간첩행위 등 각종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기독교인의 저항에 대한 칼 바스 (Karl Barth) 목사의 글이었다. 네덜란드 기독교 지도자들이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스 목사를 방문하여 기독교인들이 저항운동에 가담해야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기독교인들이 나치에 저항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일 뿐만이 아니라 피하는 것은 죄”라고 대답한 글이다.
칼 바스는 나치정부 지지를 거부하고 독일을 떠나 바젤로 온 후 기독교인들의 반 나치 운동을 주도했던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의 한 사람이다. 신학대학원 재학 시 그의 저서 “하나님의 인성 (The Humanity of God)”을 읽은 적이 있다. 라인강 크루즈 종착지점이 바젤이라 그가 가르쳤던 바젤대학교 신학부를 가볼 생각을 뉴욕을 출발하기 전부터 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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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 빛과 사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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