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잎 사이로 침묵이 흐르면 산 넘어 강가엔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살갗을 휘감는 찬바람에 잊었던 외로움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계절.
여름날 뜨거웠던 열정도, 그 빛나던 푸르름도, 이제는 침묵 속으로 흡수되는 시간. 드높은 하늘에 뿌려진 구름처럼 내 그리움의 잔상들이 흩어지는 가을. 봄 들판엔 꽃이 피지만 겨울 없는 내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꼭 잡은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했던 초등학교 첫날 그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60. 인생의 마지막 계절과 맞닥트린 소회를 표현해 보았다. 환갑은 자신이 태어난 해와 같은 육십갑자의 간지 해가 다시 찾아온 것을 의미한 회갑으로도 불린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60세가 되면 살아있는 조상으로 승격돼 풍성한 제사상을 받은 후 장남에게 안방을 물려주고 사랑채로 내려갔다. 노동이 곧 경제력이던 농경사회에서 노쇠한 부모를 쉬게 하는 풍습이었을 것이다.
‘인생불만백 상회천세우’.
“사람이 백년을 채워 살지도 못하면서 늘 천년어치의 근심을 품고 사네.”한나라 때의 민요 서문행의 구절처럼 저마다의 근심을 품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사다.
특히 많은 현안 속에 일상을 보내는 경영자의 십수년 세월엔 잔물결이 그칠 날이 없었을 것이다. 비정한 결단과 비열한 처신도 생존이라는 절명의 순간 앞에는 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회로 밀려온다.
잘 했던 기억보다 어리석었던 순간들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계절, 그래서 인생의 가을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인고의 세월을 헤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인 1세 사업가 중 대부분은 60대를 넘어선 장년 층이 됐다. 다수는 은퇴를 했거나 준비 중이지만 이미 회사에서 물러난 사람이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처음 몇달은 그동안 미뤘던 여행이나 취미생활로 바쁘게 보내지만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에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나 상실감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은 당사자의 철학적 빈곤과 물질적 욕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재물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이기적 사람일수록 시간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고 자신이 유능해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풍요로워진 한국인들이 정신적 빈곤에서 허덕이는 오늘의 모습은 전도된 가치관의 결과 이며 존경하는 어른을 찾기 어려운 작금의 상황은 철학의 빈곤을 더욱 가속화시킬게 분명하다.
흔히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 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정부분 빈곤한 우리의 심리를 반영하며 그래선지 한국인만큼 젊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민족도 드물다. 시간을 역행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으며 연륜과 반대로 가는 인격만큼 불쌍한 모습도 없음을 장년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항상 같은 정신 세계에 머물러선 안 되는 중요한 이유다.
때에 따라 행동하고 나이가 들면 내면의 세계도 풍요롭게 익어가는 게 가을 다운 어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노년의 교민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재단설립이 유행이다. 취지는 환영할 일이지만 일부는 자기 과시나 세금회피 등 저급한 의도를 갖고 있음도 사실이다.
한인타운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책임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인사회 기부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호소한다. 교민들이 이룩한 경제적 성취와 설립된 자선 재단의 숫자에 비하면 그 참담한 수준에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사회로부터 누구보다 혜택 받은 성공한 사람들이 ?쉽沮?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옆에서 보기에도 측은하고 불쌍하다. 진심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면 많은 미국인처럼 건실한 자선 단체를 조용히 돕는게 바람직한 장년의 처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떫은 감이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띠고 파랬던 벼가 황금색으로 고개 숙인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 풍성하고 아름답다.
가을에 파란 잎은 무심히 밟고 가지만 곱게 물든 낙엽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건네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한 시인의 독백처럼 인생의 마지막 계절에 나는 무슨 물이 들어가고 있는지 사색하는 장년들이 한인사회에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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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보에어 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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