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추석 연휴 전남 진도군 의신면의 시아버지들이 박수를 받았다. 진도는 수도권에서 자동차로 예닐곱 시간 걸리는 먼 곳,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의신면 섬으로 들어가려면 총 10시간이 족히 걸린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도 땅거미 질 무렵에야 고향집 문 앞에 당도하는데, 부부의 공통적 명절 경험은 거기까지이다.
대문을 넘는 순간 남편 즉 아들은 거실로 향하고 아내 즉 며느리는 부엌으로 향한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한 남편(아들)은 피곤이 싹 가신듯 명절 즐길 마음에 들뜨고, 똑같이 먼 길 온 아내(며느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옷 갈아입고 음식 장만에 나선다. 명절 연휴 내내 남성들은 노느라 바쁘고, 여성들 특히 며느리들은 수도 없이 상 차리고 설거지하느라 손이 마를 새 없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 명절 풍경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명절은 여성의 노동절’ ‘노는 사람 따로, 일하는 사람 따로’ ‘명절 증후군’ 등이다.
명절에 시가에 갈 생각을 하면 머리부터 아프다는 며느리들이 늘어나고, 핑계만 있으면 먼 길 나들이를 접고 싶어 하는 며느리들이 늘어나자 그런 분위기가 가부장제의 최고 권위인 시아버지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의신면 41개 마을 이장단은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며느리들을 맞았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전통적 가부장제에서는 이슈도 되지 않던 ‘집안일’이 시대가 바뀌면서 가족들 사이에 사사건건 말썽의 불씨가 되고 있다. 과거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역할과 활동무대의 구획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바깥양반’은 집 밖에서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일을 했고, ‘안사람’은 집 안에서 가족들을 보살피는 집안일을 했다. 부부는 각자의 영역이 다르니 불만은 있어도 일로 인한 마찰은 없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당연시되고 부부가 맞벌이 하지 않고는 먹고 살기 어려운 지금, 집 밖에서 성별 역할의 경계는 무너졌다. ‘바깥양반’도 ‘안사람’도 집 밖으로 나가 돈 버는 일을 한다. 그런데 집 안으로 들어오면 여전히 집안일은 ‘안사람’ 몫이라는 인식이 지워지지 않아서 부부갈등의 불씨가 되고, 명절증후군의 원인이 된다.
설거지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현수막까지 걸어야 하는가. 음식장만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명절에 짜증 섞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온가족이 함께 나눠하면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될 일을, 여자에게만 며느리에게만 책임을 지우니 불평등하고 억울한 느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과 멜린다 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게이츠 재단은 매년 그해의 주요 사업들을 연초에 발표한다. 지난 2월 멜린다는 2016년 최우선 과제로 가사노동과 관련한 남녀 불평등 해소를 꼽았다.
보수 없는 노동인 집안일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에 필수적이지만 두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과도하게 여성에게만 부담이 주어진다는 사실, 둘째는 돈을 벌지 않는 일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체가 무시당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일을 주로 하는 여성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여성들은 가사노동에 묶여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놓치고, 그 결과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빈곤에 내몰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분석이다. 게이츠 재단은 빈곤지역의 생활환경 개선으로 전체적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고, 각국에서 출산^육아 유급휴가 제를 도입하는 등 정책 개선으로 남녀 간 가사노동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은 하루 평균 4.5시간 가사노동을 하는 반면 남성들은 그 절반을 채 못 한다. 국가별로 남녀 불균형이 가장 심한 나라는 인도. 여성이 5.9시간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남성은 0.9시간 한다. 남녀가 가장 평등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나라는 노르웨이. 남성 3.1시간 여성 3.6시간. 미국도 비교적 균형이 잘 잡힌 편으로 남성 2.7시간, 여성 4.1시간 가사노동을 한다.
그런데 OECD 통계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남성들의 가사노동 순위 1위는 노르웨이인 반면 꼴찌는 한국이다. 한국 남성은 하루 평균 0.7시간 즉 40분쯤 집안일을 한다. 아내들이 근 4시간 쓸고 닦고 밥하고 설거지하는 동안 남편들은 무엇을 하는 걸까.
이곳 한인사회 맞벌이 부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똑같이 돈 벌면서 (남편이) 집안일은 모른 척한다”는 불만이 아내들의 가슴에 쌓여있다. 하찮은 설거지가 부부싸움으로 폭발하는 배경이다. 집안일은 남편이 아내를 돕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함께 하는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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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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