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저녁,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연세가 90을 넘었고 가벼운 치매 증상도 있었으니 ‘잘 가신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말뿐일 것이었다. 존재의 기반이 무너져 내려 허공에 발을 디딘 듯, 아득한 충격이 묵직하게 밀려들고 있을 것이었다.
한 시간쯤 후 친구는 다시 전화를 했다. LAX 공항 진입로를 막아놓아서 차들이 꼼짝 못하고 서있고, 여행객들이 공항에서 도망치듯 달려 나오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 뉴스에 보도된 게 있느냐고 물었다. TV를 켜니 아수라장이 된 공항 일대가 실황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저녁 8시45분쯤 “총격 소리를 들었다”는 신고를 시작으로 “공항에 총기난사범!”이란 신고^경고가 쏟아지면서 공항은 한순간에 ‘테러 현장’이 되었다. SNS로 소식을 접한 가족친지들이 터미널에 있는 여행객들에게 전화를 하고, 놀란 여행객들은 어디에 있을지 모를 ‘총격범’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하고, 혼비백산한 그들을 보고 “무슨 일이 났다보다” 생각한 사람들이 또 합류하고, 비상체제에 돌입한 경찰들이 각 터미널로 몰려들어 대피를 지휘하고, 공항으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을 봉쇄하고 ….
지난 28일 밤, LAX에서는 5개 터미널에서 대피소동이 있었고, 3개 터미널이 폐쇄되었다. 공항에 착륙하려던 여객기들은 공중을 맴돌아야 했고, 공항으로 향하던 자동차들은 인근 모든 도로를 거대한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280대 비행기의 이착륙이 지연되고, 27대 여객기는 회항했으며, 2개 비행 편은 운항이 취소되었다.
다행이라면 총에 맞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애초에 총격은 없었다. 총기난사범도 물론 없었다. 어떤 큰 소리를 누군가가 총소리로 오인한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결과였다.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인데, 희극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위험의 실체도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였다는 점에서 사건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두려움. 두려움이 군중심리로 작용하면서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집단패닉 즉 공황 사태를 만들어냈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이 목숨 걸고 이루려는 것, 테러의 목적이다. 그들은 손도 까딱 안했는데, 최근 미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
LAX 대피소동으로부터 정확히 2주 전, 뉴욕의 JFK 공항에서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큰 소리를 총격사건으로 오인하면서 2개 터미널에서 수천 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역시 총격은 없었다. 문제의 ‘큰 소리’는 터미널의 한 카페에서 리우올림픽 중계를 보던 여행객들이 우사인 볼트의 우승에 일제히 환호한 소리였던 것으로 잠정결론이 났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달 노스캐롤라이나(13일), 미시건(20일), 플로리다(25일)의 샤핑몰에서는 풍선 터지는 소리, 유리문 깨지는 소리 등을 총소리로 착각, 공포에 휩싸인 샤핑객들이 한꺼번에 도망치면서 여러 사람이 부상했다.
돌아보면 9.11테러 이전에는 이런 집단 신경증적 현상을 미국에서 본 기억이 없다.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수천 명이 떼죽음 당하는 광경을 눈으로 지켜본 충격이 우리의 뇌리에 공포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 같다. 파리, 니스, 브뤼셀, 이스탄불 등지를 공격한 IS 테러, 그리고 샌버나디노, 올란도 등지의 국내 총기난사 사건들이 그 씨앗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작은 핑계만 있으면 공포에 휩싸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모두가 도망가는 공항에서 혼자 남아 차분하게 원인을 따져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두려움은 진화의 선물이다. 인류의 조상들 중 두려움 없는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맹수들, 낯선 사람들, 못 보던 식물들, 이상한 자연현상들 … 생존을 위협받을까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한 사람들만이 살아서 후손을 낼 수 있었다. 생존본능의 산물로서 두려움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려움이 지나치면 이 또한 생존을 위협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인 아레스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쌍둥이 아들들을 데리고 갔다. 포보스와 데이모스이다. 포보스는 포비아(공포), 데이모스는 테러(두려움)의 신이다. 적군에게 공포심과 두려움을 심어주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결판이 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출현했나 보다. 큰 소리만 나면 지레 총소리로 짐작하고 단체로 겁에 질리는 비이성적인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부인할 수 없는 ‘테러 시대’이다.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짓눌려서는 삶이 불가능하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라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을 기억하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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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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