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앞에서 보고를 마친 부하가 “등을 보이는 건 불경스런 행동”이라며 뒷걸음질로 물러나오다 무언가에 걸려 자빠진다. 사극이나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 같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난 곳은 21세기 청와대 안이다. 넘어진 사람은 장관이고 걸린 것은 카펫이다.
전직 여당 대표인 김무성 의원 입에서 나온 얘기니 ‘카더라 통신’은 아닐 것이다. 김 전 대표가 얼마 전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든 일화다. 박정희 시절 장관들이 뒷걸음질로 대통령 집무실을 물러나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딸 세대까지 이런 낡은 의식이 남아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김 전 대표가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청와대의 제왕적 분위기를 민주적 분위기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통령 집무실 구조부터 민주적 구조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서류를 들고 3층 자기 사무실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간 후, 경호원이 총 들고 지키는 문을 통과해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가, 운동장만한 방에 홀로 앉아 있는 대통령 앞에 서야하니 무슨 쓴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김 전 대표의 지적은 새로운 게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데 청와대 구조가 한 몫 하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거리상으로 500m나 된다. 총리 집무실과 비서실 사이의 거리가 단 열다섯 걸음에 불과한 독일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공간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공간은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심리가 공간을 결정하기도 한다. 공간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소통이 경직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대통령과 참모들은 수시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청와대 구조로는 대통령과 비서진 간의 원활한 소통은 애시 당초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바로 옆에 붙어 보좌하는 극소수 측근들의 영향력이 비대해지는 비정상적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런 공간상 문제 외에도 청와대는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으로 만드는 터 위에 지어졌다고 말하는 풍수지리 전문가들도 있다. 풍수지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청와대의 공간배치가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통령과 총리관저 구조는 한결같이 개방형이다.
지난 2012년 한국 대선 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종합청사로 옮기고 청와대는 일반 국민들에게 개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부터 대통령 집무실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며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나와 국민들과 늘 소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낙선으로 개방형 대통령 집무실을 볼 기회는 물 건너갔지만 그렇다고 그 공약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한국정치 후진성의 많은 부분은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그 하나는 지나치게 모든 권력이 대통령 한사람에게 집중돼 있는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라는 권부의 공간이 지니고 있는 비민주적 구조이다. 한국이 진정한 선진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와 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선행돼야 한다.
제도와 법률 개선을 통해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한국 대통령제의 병폐가 되어 온 ‘승자독식’ 을 끝내는 작업이 된다. 그러면서 현재의 청와대 구조를 개방형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과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민주주의, 국민들 앞에 겸손한 권력이 가능해 진다. 멀쩡한 사람도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권위주의적으로 변한다는 청와대에 권위주의가 배어있는 인물이 들어간다면 어찌될지 상상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