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느 순간 문을 연다.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던 문,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벽,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천장 …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만큼이나 ‘불변’으로 보이던 많은 것들이 역사의 흐름을 타고 변해왔다. 2016년 7월28일 역사는 문 하나를 새로 열었다. 미국에서 여성 대통령후보가 탄생했다.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이 건국된 지 240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227년, 18-19-20세기를 거쳐 21세기 초엽까지 미국이 맞았던 44명의 남성 대통령 이후,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 참정권을 얻음으로써 이 나라의 온전한 국민으로 대접받게 된 지 96년. 오랜 세월 여성의 삶에는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것이 있었다. 삶의 당연한 조건인 듯 붙어 다니던 것, ‘차별’이다.
남성에게는 허용되고,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재산을 소유할 권리, 동등하게 교육받고 취업할 권리, 이혼할 권리, 투표할 권리, 하다못해 바지 입을 권리까지. 여성들은 그 모두를 싸워서 얻어야 했다. 거저 주어진 것은 없었다. 때로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했던 험난하고 긴 여정 혹은 투쟁 끝에 오늘의 여성들은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한걸음을 더 나아갔다. 필라델피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지명 수락연설을 하는 순간 미국은 새 역사의 장으로 들어섰다. ‘대통령의 꿈’을 가로막았던 성별의 장벽은 무너졌다.
힐러리는 우리가 오래 보아온 인물이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부터 24년을 보아왔다. 그 동안 사회도 변화하고 힐러리도 변화했다. 이번 대선후보 지명은 여성을 보는 사회적 시각의 진화 그리고 여성으로서 힐러리의 현실 적응이 함께 만들어낸 행복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 부부가 처음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때 미국사회는 힐러리의 야심과 능력을 불편해했다. 클린턴이 자신보다 더 똑똑한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며 내건 ‘하나 사면 하나 공짜’ ‘하나 값에 둘’ 캐치프레이즈에 사회는 박수 치지 않았다. 백악관 입성 후 힐러리가 불철주야 구상하고 추진한 방대한 의료개혁안에 사회는 냉담했다.
일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는 힐러리와 사회적 기대 사이의 괴리는 컸다. 원인은 하나,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사회는 잘난 여성을 백악관 안주인으로 원하지 않았다. 쿠키 굽고 집안장식하며 남편 뒤에서 다소곳한 퍼스트레이디를 원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는 겪을 만큼 겪었을 것이었다. 2008년 대선경선에 나서면서 그는 ‘여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능한 한 ‘여성임’이 부각되지 않도록 남성보다 더 남성적으로 캠페인을 했다. 하지만 8년 후인 이번 캠페인은 달랐다. 자신이 엄마이자 할머니라는 사실, 여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일하며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어려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어린이와 장애인 등 약자를 보살피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운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밀레니얼 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나이든 여성들이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어한다. 여성이라서 차별당한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만큼 평등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그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힐러리는 지명수락 연설 중 “나의 어머니의 딸로, 나의 딸의 어머니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여성 후보로서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말이자, 여성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며 개선되었고 개선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에게 투표권도 없을 때 태어났다. 다음 세대인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고교시절 그는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바보 같다’ 는 말을 들었다. ‘여자가 무슨 학생회장이냐, 당연히 안 될 걸 왜 하느냐’는 지적이었다. 그의 딸 세대에는 남자 보다 여자 학생회장이 더 많다.
힐러리는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지정장을 입고 지명수락 연설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성이 바지차림으로 공공장소에 나가면 체포당했다. 19세기 후반 진보적 여성들이 무릎길이 스커트 밑에 바지를 입자 사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녀의 경계를 흐리는 악마 같은 행위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본선까지 100일. 힐러리가 여성 최초의 대선후보에 이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힐러리의 포기를 모르는 집념 덕분에 이미 역사의 문 하나가 열렸다. 이 나라의 아들들뿐 아니라 딸들도 대통령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힐러리의 선물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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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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