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투명한 권력이다. 권력이 투명하다는 것은 시스템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고 그 과정에 철저한 감시와 감독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법이 정한 방식과 절차에 따라서만 행사된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올바로 뿌리내린 나라의 모습이다. 이런 나라에서 권력자 주변 인사들이 윗사람의 이름과 뜻을 팔아 국정을 농단하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행태는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하지만 그 권력의 테두리는 명확하다. 큰 권력을 가졌다 해서 아무 일에나 마구 이것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바로 탄핵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 이런 처지니 대통령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백악관 스텝이나 민주당 의원이 오바마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통령의 측근이라 하면 기껏해야 영향력이 조금 더 있을 뿐이다. 이래야 정상이고 제대로 된 정치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 정권 8년여 동안 국민들이 신물 나도록 들어오고 있는 고사성어가 있다. ‘호가호위’(狐假虎威)가 바로 그것이다. 말 그대로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권력 행사방식이 시스템보다는 권력자 개인의 의중과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국가나 기업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후진적 형태의 부조리요 비리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들, 이른바 ‘진박’ 핵심인사들의 총선공천 개입사실이 녹취록 등을 통해 확인되면서 ‘호가호위’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대통령의 뜻’을 들먹이며 특정후보에게 지역구 포기를 종용하고 총선 때는 ‘진박 감별사’를 자처하며 눈꼴사나운 행태까지 서슴지 않았던 이들은 호랑이를 팔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못난, 아니 못된 여우들에 딱 들어맞는다.
그렇다고 모든 죄를 여우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여우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호랑이의 허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현명했더라면 여우들의 호가호위는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우들의 전횡은 근본적으로 호랑이의 판단력 부족과 수하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우둔함에서 비롯된다. 권력자가 주변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또 그러기 위한 소통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권력자 이름을 팔아 자기 권력을 누리는 못된 여우들이 발붙일 여지는 없다. 이명박 정권시절 공공연히 2인자 행세를 하던 최측근의 온갖 비리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그럴 리가 있느냐”며 펄쩍 뛰는 바람에 그냥 나왔다는 한 인사의 회고는 호가호위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잘 보여준다.
호가호위와 이에 따른 레임덕은 주로 권력 말기에 나타난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집권 중반을 넘기기도 전부터 징후가 나타났다. 집권 2년차에 터졌던 정윤회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과 ‘문고리 권력’ 논란은 일반적 패턴에서 벗어난 호가호위 케이스였다.
이 같은 전횡의 토양이 되는 것은 박 대통령의 폐쇄적인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의 비밀주의 리더십은 아버지 죽음과 배신감에 따른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런 스타일은 대통령의 결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리고 대통령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그러면서 소수의 최측근들이 ‘대통령의 뜻’을 팔면서 호가호위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호가호위라는 구태를 없애려면 잘 정비된 시스템과 권력자의 올바른 의식, 그리고 정치문화의 수준이라는 삼박자가 두루 뒷받침돼야 한다. 대한민국은 명문화된 시스템은 그런대로 갖추고 있지만 권력자의 의식과 정치문화 수준에서는 여전히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 한때 권력자의 의식면에서 진전이 있었지만 정치문화가 이를 따르지 못해 지금은 수십 년 전으로 다시 퇴행한 상태다.
못된 여우 뒤에는 어김없이 어리석은 호랑이가 있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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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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