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상대가 있는 싸움이다. 자기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다. 혼자 하는 경기라면 자기에게만 집중하면 되지만 상대가 있는 싸움은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한다. 상대 공격을 어떻게 맞받아치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느냐가 결정적으로 승부를 가른다.
겨루기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상대에 따라 내 플레이의 수준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수준 높은 상대를 만나면 어렵기는 해도 내 플레이까지 덩달아 괜찮아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반면 상대가 형편없으면 내 플레이 또한 엉망이 되기 일쑤이다.
권투를 예로 들어 보자. 상대가 일정 거리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려하기 보다 툭하면 붙잡고 넘어지려고만 한다면 정상적인 경기가 힘들어진다. 기량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서로 엉겨만 있다가 경기가 끝날 수 있다.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수준 있는 대결을 펼치려면 서로 괜찮은 파트너가 돼야 한다. 파트너가 자꾸 내 발을 밟아대면 내 스텝도 꼬여버린다.
이런 비유를 드는 이유는 이번 대선이 역대 최악의 진흙탕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작단계지만 지금까지의 조짐과 추세를 보면 이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는 물론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지난 달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 구상을 밝히는 유세를 가졌다. 하지만 이 유세는 힐러리가 자신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밝히기보다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지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는 자리가 됐다. 지지자들은 환호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대선이 ‘트럼프스럽게’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렇게 가다가는 힐러리가 트럼프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트럼프는 19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공식 확정됐다. 대선전이 본격화되면 그의 과거와 관련한 갖가지 의혹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힐러리로서는 이런 의혹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트럼프를 공격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기도 힘들다. 실제로 트럼프 대학 의혹이 제기됐을 때 힐러리는 “트럼프는 사기꾼”이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힐러리가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다. 트럼프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지난 수십년 동안 비즈니스와 사생활 등과 관련해 셀 수 없이 많은 추문을 만들어 온 ‘스캔들 공장’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도덕적 청렴성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의혹들이 나온다고 해도 지지자들이 마음을 바꿀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아니, 공격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지지도가 더 견고해 질 수도 있다.
스캔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무감각해 진다. 일종의 굳은살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 대선을 봐도 그렇다. 대쪽 이미지가 강했던 이회창은 자녀 병역문제 하나로 쓰러졌지만 기업인 이미지가 강했던 이명박은 여러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사람들에게는 상대의 어떤 태도가 반복될 때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태도 면역’이라는 것이 생긴다.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라며 그러려니 여기게 되는 것이다. 트럼프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정치판에서는 “스캔들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어 전략은 더 많은 스캔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스캔들을 겨냥한 네거티브 캠페인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진흙탕 싸움이 되면 될수록 트럼프의 노림수에 휘말릴 위험이 높다. 혼자 벌이는 레이스가 아닌 만큼 상대 공격에 대응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는 전략으로는 트럼프를 잡기 힘들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의 균형을 잘 유지해 나가느냐가 11월 승리를 위한 힐러리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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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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