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리하는 중에 보는 동물들
세계의 단일공원 중 두 번째로 넓은, 650만평의 땅 부자 애니멀킹덤으로 향했다. 애니멀 킹덤은 Discovery 섬, 아프리카관, 아시아관, 공룡랜드로 짜여있다. 파크 안의 열대우림과 사막엔 300여종의 동물, 1000여 마리의 새들, 2,000여종의 관목과 십만여 그루의 나무들이 숨 쉬고 있다. 실제동물 외에 상상의 동물과 멸종동물의 조형물도 있단다.
가장 인기라는
을 보러갔다. 둥근 천막지붕에 중앙무대라 서커스 공연장이다. 아프리카 토속인으로 분장한 배우들의 전통춤사위와 노래다. 잠시 후, 관중석 네 귀퉁이에서 실물크기의 거대한 기린, 코끼리, 사자, 코뿔소가 쓱 나와 관전한다.
생명체로 여겨질 생생한 비주얼이 시선을 끈다. 바로 옆, 기린의 눈에선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듯하다. ‘목이 길어 슬프다’는 사슴보다 목이 길어선 가. 평원의 향수병인가.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까지 끄덕끄덕하는데,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될 만큼 리얼하다. 저쪽 코끼리는 무대 쇼가 놀라운지 박수친다며 긴 코를 올렸다 내렸다 휘감았다 나름대로 바쁘다.
건너편의 사자 역시 밀림의 왕은 나인데, 왜 인간들이 휘젓느냐며, 입을 다시고 포효한다. 성대제거수술을 받은 개처럼 소리도 안 나오니 딱하다. 코뿔소는 멀어 관찰 불가다. 바야흐로 라이언 킹 쇼의 30분짜리 축소 공연은 점입가경이다. 입으로 하는 불 쇼, 기계체조, 줄타기 등 아슬아슬한 ‘묘기대행진’은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갔다 들어온다. 연습량과 재능들이 대단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영혼이 없는 기계동물들의 조용한 몸짓에 더 관심이 갔다.
아프리카관의 킬리만자로 사파리 보는 줄에 서있는데, 게릴라성 소나기가 퍼붓는다. 너도 나도 하얀 미키마우스 판초우비를 입고 걸으니 펭귄들의 행진이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인 ‘콰이 마치’가 울리면 딱 이겠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비를 찬미했고, 소설가 스탕달은 ‘질척하고 밉살스러운 비’라며 혐오했다. 평소는 시인 편에 섰었는데, 오늘은 소설가에 동조다. 난감해하며 합승스타일로 개조한 사파리 트럭을 타는 순간 비가 멈췄다. 기적처럼.
생명의 나무 몸통에 새긴 동물조각들.
높은 언덕 위에 아주 잘 생기고 멋진 나무가 시야에 꽉 찬다. 바로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다. 둘레가 15미터에 키가 14층 높이로 우람하다. 나무기둥이 무척 넓은데 수피가 우툴두툴 입체적이다. 넝쿨식물들이 극성스럽게 덮은 줄 알고 ‘나무가 참 가렵고 고통이겠네’생각했다. 그런데 멋지게 속았다. 굴곡무늬는 등걸에 325종의 동물을 조각한 거고 나무자체도 인공나무란다.
‘어린왕자’가 “좋아하지만 뿌리가 너무 깊고 크게 자라 방치하면 별 전체를 휘감을 거라 묘사했던” ‘결국엔 어린 왕자별을 두 동강 냈다’는 그 아프리칸 바오밥(Baobab)나무였다. 신의 손으로 가장 먼저 만든 나무라는 아프리카 전설에 입각해서 바오밥을 택했나? 그나저나 저리 큰 나무에 셀 수 없는 곁가지, 유난히 작고 무성한 이파리들을 어떻게 다 붙였지? 인간의 손길 또한 유한하다.
사파리차가 하도 덜컹거리기에 땅바닥을 살폈다. 저런! 땅이 아니고 황토색을 입힌 콘크리트다. 시멘트로 만든 나무무늬 인조목 벤치는 봤어도 콘크리트로 만든 모조 땅은 처음 본다. 사람들은 그저 밀림의 흙 땅이려니 하겠지만 내 눈엔 금세 들통이 났다. 꽤나 고심한 흔적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예컨대 바닥을 경사지게해서 물 고인 웅덩이로 만들고는 쇠스랑 판을 깔았다. 심지어 차바퀴에 눌린 땅엔 타이어무늬흔적을 선명하게 새겼다. 늪지대라며 차에 밀린 진흙둔덕과 고랑까지 있다. 차가 적당히 리드미컬하게 흔들려서 탐험기분고조상승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다.
사파리란 게 행운이 따라줘야 동물을 본다는 통설이 여긴 해당불가다. 동물들이 사람들의 눈에 닳고 닳아선지 ‘볼 테면 봐라!’식의 무관심주의다. 오히려 인간 친화적인지 길가나 차 바로 옆에서도 자연스레 일상성을 영위한다. 몸체가 작고 하얗지만 분명 홍학이기에 하얀 홍학도 있나 했다. 알고 보니 어릴 땐 흰색이다가 크면서 붉게 변한다나.
‘미운 오리새끼’다. 맹수의 시야에 커다란 동물로 착시되게 항상 몰려있다는 얼룩말들은 생명의 안전지대임에도 여전히 뭉쳐있다. 군집 형에 주행성인 코끼리도 ‘나홀로’가 아닌 채 서있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고 못 고치는 인간의 천성처럼, 동물의 본성과 유전자도 어쩔 수 없나보다.
비조차 결정적인 순간에 멈춰준 행운의 날이라 이름을 아는 동물은 거의 다 봤다. 사흘 동안 숱하게 접한 조형동물들과는 확실하게 구별된 생명감이 있다. 그럼에도 생에 의욕을 잃은 듯 움직임이 나른하다. 생존경쟁 없는 환경에 긴장감이 배제돼서인가. 야성미커녕 무력증에 빠진 듯 맥이 다 나갔다. 애들을 키울 적에, 지나친 과보호는 결코 행복과 성공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자연스레 상기된다.
천막지붕의 노천계단에 앉아 를 25분간 즐겼다. 조련사의 부름에 새가 작은 문에서 쏘옥 나오고, 들어가라니까 냉큼 들어간다. 조련사 팔에 앉은 새보고 “내말 들어 봐!”하니까 얼굴을 바싹 조련사 쪽으로 기울이고 고개를 쫑끗 듣는 시늉을 해서 관중들의 폭소를 유발했다. 또 명령대로 관람석 뒤쪽의 조련사가 들은 깃발을 채갖고 온다. 관객 한명한테 돈을 들고 있으라하곤, 새한테 갖고 오라 시켰다.
새는 얼른 날아가 채갖고 오더니, 돌려주라니까 정확히 돈 임자한테 가서 떨어뜨린다. 완전 ‘달인의 경지’다. 조련사의 유니폼과 말투로 알아챈다 해도, 돈 임자랑은 첫 대면이니 대단하다.
새 쇼중에서 흰머리독수리의 모습
대미의 주인공은 미국의 국조로 귀하신 몸인 흰머리독수리다. 맹금류답게 과연 위용이 당당하다. 조련사 팔에 새색시처럼 앉아, 장기자랑 없이 무대만 돌고 퇴장인데도 카리스마의 여운이 길다. 탁월한 리더십이 있는 진정한 리더는, 보기만 해도 존경심이 느껴지는, 그런 건가.
새들의 기막힌 재주를 다 기억 못하지만, 저 조그만 머리로 어떻게 터득했으며, 얼마나 피나는 훈련반복이면 저럴까! 불가사의다. 분명한 건, 흔히들 사람을 비하시키는 표현으로 새대가리라느니 조두라고 하는데, 새를 모욕하는 절대 잘못된 말이다.
시간상 생략하다보니 수박구경쯤 돼버렸다. 최종적으로 가볍게 하마비행기탑승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애들 보디가드로 탄 어른들을 빼면, 어른들끼린 우리들뿐이다. 머쓱했지만 우리 나이쯤 되면 남의 시선에 좀 용감해지기 마련이라 통과다.
최인호 선생이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데 대부분 조연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단 며칠이지만 모처럼 나만을 위한 주인공노릇 한번 착실히 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오후 5시 45분 비행기가 연발사인만 날리다가 9시 45분에야 올란드 땅을 이륙했으니까. 그래도 작별이 서운해 ‘올란드 안녕!’하며 도시를 내려다봤다.
좀 멀리 까맣고 까마득한 허공아래에서 뭔가 번쩍번쩍한다. 은색, 빨강색, 초록색 파랑색 꽃들이 화악 화악 연달아 피고 진다. TV에서 봤던, 꽃잎들이 활짝 펴지는 순간을 슬로비디오로 포착한 영상이 스친다. ‘뭐지?’하다가 디즈니 월드가 뒤풀이로 선사해주는 불꽃이벤트란 게 깨달아졌다. ‘그럼 올란드가 여정의 백미로 저걸 보여주려고 붙잡았나? 실은 포기했던 수많은 볼거리들에서 불꽃놀이가 그 중 아쉽던 차.
더구나 여태껏은 아래서 밤하늘에 팍 퍼져나가는 불꽃들만 봐왔다. 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연꽃처럼 피어났다 사라지는 불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하늘이 아닌 지상에 뜬 불꽃들이자, 지상에서 피어나는 오색무지개 꽃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서양시중 제일 아름다운 시라는 워즈 워드의 <무지개>가 저절로 뇌어진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 볼 때면 나의 가슴은 설렌다/내 생애가 시작될 때에도 그러하였고, 나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나 늙어진 그때에도 제발 그러하거라/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으리/.../.../불꽃 꽃잎처럼.’
이번 여행길, 여러 모로 삶의 지표가 될 시금석이 됐다. 우리 나이에 필히 일상의 화두로 삼아야할 글귀를 떠올리며 새삼 다짐해본다.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 새롭게 피어난 꽃일 수 있어야한다고.’ 내 비록 몸은 조금씩 낡아가지만, 마음은 항상 저 꽃잎처럼 퍼져나가야 한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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