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월 동안 치열하게 이어져 온 당신의 도전을 접어야 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무명의 당신이 ‘정치혁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권도전을 선언했을 때 관심을 기울인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힐러리 대세론 속에서 당신은 경선 레이스의 활력을 유지시켜줄 페이스메이커 정도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버니 샌더스’라는 이름은 진보와 풀뿌리 정치의 상징이 됐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고 금권정치가 날로 기승을 부리면서 어쩌면 당신이 이런 상황을 타개해 줄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는 미국인들의 기대와 절박감이 뜨거운 지지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지지자들에게는 만약 언론이 당신에 대해 좀 더 일찍 관심을 갖고 호의적인 보도를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공평은 인간사회의 가장 보편적 현상입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조차 공평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정말 아쉬웠던 것은 ‘만약’이라는 이런 가정이 아니라, 당신의 정책과 의제에 대해 많은 유권자들이 갖고 있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인식의 장벽이었습니다. 이 장벽을 넘어서는 일이 아직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동안 미국정치를 지배해 온 담론들에 비춰볼 때 당신 주장이 일견 급진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미국의 현실을 보면 무언가 크게 달라지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을 초강대국, 선진국이라고들 하지만 국민들의 복지와 행복감에서는 이런 호칭이 부끄럽게 된지 오랩니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양극화를 조장해온 정치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현실과 실용주의라는 미명 아래 타협만을 반복해온 중도 진보세력의 잘못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기껏해야 현상유지가 지속될 뿐 미국은 결코 달라지거나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변화를 위해 무언가 좀 더 강력한 자극과 시도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 민주당원은 최근 미국신문 기고를 통해 “버니 샌더스의 정책과 아이디어는 유럽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라고 말하더군요. 독일에서는 이것이 ‘특혜’나 ‘혜택’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라는 겁니다. 버니, 당신이 제시한 이상론적인 아이디어들은 그런 점에서 시도해볼 만한 충분한 명분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무수한 유권자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냈던 것이겠지요.
경선은 숫자싸움입니다. 그리고 버니, 당신은 이 싸움에서 뒤져 패했습니다. 하지만 당신 집회에 사람들이 운집하고 간혹 여론조사 예측을 뒤집는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 탐 글래빈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이 별로 빠르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글래빈은 “야구를 향한 나의 뜨거운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차가운 숫자에 유권자들의 열정은 찍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열정은 변화를 갈망하는 불씨로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해, 유세장에서 빗질하지 않은 헝클어진 백발로 격의 없이 젊은이들과 악수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 또한 보기 좋았습니다. 소통은 나이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씨를 뿌린 정치혁명은 물리적 혁명이 아니라 각성의 혁명이었습니다. “버니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 잡은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 잡은 것”이라는 한 언론의 논평은 이런 사실을 잘 압축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뜨는 유권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의 패배에는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11월 대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하지만 만약 부통령 제의가 온다면 정중히 거절하기 바랍니다. 별로 할일 없는 무기력한 자리에 앉아 있기 보다는 아웃사이더로서 날카로운 비판과 쓴 소리를 서슴지 않는 모습이 당신에게는 더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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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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