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이 드디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른 이번 주, 미국사회 한편에서는 이름 없는 한 여성이 주목을 받았다. 그의 법정 호소문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전국 여성들의 가슴에 아픈 불을 지폈다.
마지막 유리천장, 대통령직이 여성의 진출영역으로 들어올 만큼 성평등이 개선된 지금, 아직도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 가부장적 성차별 의식이 성벽처럼 공고한 분야, 바로 성과 관련된 인식이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그 대상, 주체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면 필시 그 대상에 문제가 있었으리라는 선입관이 21세기인 지금도 대중적 의식의 뒷전에 똬리를 틀고 있다.
23세인 앞의 여성은 2015년 1월17일을 기해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학졸업 후 풀타임 직장인으로 일하던 그는 토요일이던 그날 밤 여동생을 따라 스탠포드의 한 남학생 클럽 파티에 갔다. 집에서 10분 거리로 가까운데다 모처럼 집에 온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18, 19살 어린 학생들 속에 섞여서 신나게 놀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대학졸업 후 주량이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 문제였다. 너무 갑자기 너무 많은 술을 마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만취해 의식을 잃은 그를 쓰레기하치장 옆에서 한 남학생이 성폭행했다는 사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대학원생들이 현장을 보고 그를 붙잡아 경찰에 넘기고 자신은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그는 뉴스를 보고 알았다. 자신의 몸을 벗어던져 버리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해자인 브록 터너(20)는 기소돼 지난 3월 성폭행 관련 3개 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받았다. 주 교도소 최고 14년형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지난 2일 재판에서 판사는 카운티 구치소 6개월 형에 보호관찰 3년을 선고했다. 초범인데다 술에 취해 저지른 일이고 그 동안 미디어 보도로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술 더 떴다. 아들이 단 ‘20분간 한 일’로 인해 너무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교 수영 챔피언으로 스탠포드에 체육장학생으로 입학한 터너는 기소 후 장학금이 취소되면서 학교를 자퇴했다. 올림픽 출전의 꿈도 접었다. 아들이 우울증 불안증에 시달리면서 “스테이크를 구워주면 그렇게도 잘 먹던 아이가 통 먹지를 못한다”고 아버지는 안타까워했다. 이런 일로 청년의 앞날을 막을 수 없다는 판사, 아들이 뭘 그렇게 죽을죄를 졌느냐는 아버지 - 성폭행을 바라보는 남성중심 시각의 현주소이다.
2일 법정에서 피해 여성이 읽은 호소문은 가해자를 향한 편지였다. 그의 폭행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참혹하게 망가졌는지, ‘술이 문제였다’ ‘합의 하의 관계였다’는 등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지를 조목조목 밝혔다. 호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여성들은 분노했다. 판사에 대한 비난이 들끓으면서 스탠포드 교수를 중심으로 주민소환 청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어느 범죄든 피해자가 동정을 받지만 성범죄는 다르다. 가해 남성에게는 가능한 한 이해의 시선을, 피해 여성에게는 의혹/비난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거의 예외 없이 조명을 받는 것이 술, 그리고 여성의 야한 옷차림이다.
술은 이중적이다. 남성에게는 면죄부를 여성에게는 피해의 근거를 제공한다. 가해 남성이 ‘만취한 나머지’ 성욕을 통제하지 못해 성폭행을 했다는 식이다. 성폭행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술’이 되고 만다. ‘너무 취해서 저지른 일’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여성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했다고 하면 비난이 터져 나온다.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느냐’는 식이다.
지난 4월말 아케디아 대학의 한 사진전공 여학생이 특이한 사진전을 열었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만나 사건 당시 그들이 입고 있었던 옷을 촬영한 시리즈전이다. 성폭행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여성이 무슨 옷을 입었는데?”하며 옷차림을 촉발원인으로 보는 선입관에 도전하기 위한 시도였다. 사진전에 나온 옷들은 하얀 티셔츠, 회색 체육복, 체크무늬 남방 등. 스탠포드 성폭행 사건 피해여성은 그날 가디건을 입고 파티에 가서 도서관 사서 같다는 놀림을 받았다.
성폭행은 단순히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 파괴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한다. 술이 범인이 아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에 있어서 남성은 주체, 여성은 그 대상으로 보는 고정관념이 문제이다. 깨트려야 할 의식의 유리천장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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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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