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고, 출마하고, 이끌라’ - ‘백악관 프로젝트’라는 여성단체가 운영하던 프로그램 VRL(Vote, Run, Lead)이다. 여성의 리더십 계발을 목적으로 한 이 단체는 이름에서부터 목표를 분명히 했다. ‘백악관’이다. 미국여성들의 마지막 남은 유리천정이다.
미국에서 여성 정치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해는 1920년이다. 나라가 세워지고 근 150년 만에 여성이 참정권을 얻어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 중요한 해로는 1992년이 꼽힌다. 그해 선거에서 여성들이 대거 연방의회(상원 4명, 하원 24명)에 진출해 ‘여성의 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여성계는 감격했다. 남성전용 클럽이던 연방의회의 벽을 드디어 여성들이 무너트렸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성벽을 넘어 여성 정치인들이 줄줄이 입성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남성중심 전통의 벽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상황은 의사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방의회 안으로 진입했다고 다 된 게 아니었다. 연공서열로 움직이는 의회 문화 속에서 초선의 여성의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고 ‘여성의 해’ 정치인 중 한명인 바바라 박서 상원의원은 말했다.
여성의 정계진출을 장기적으로 돕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런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 ‘백악관 프로젝트’였다. 1998년 조직된 이 단체는 10년을 내다보았다. 2008년 선거를 목표로 정지작업을 해서 보다 많은 여성들이 보다 준비된 조건에서 출마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정지작업이란 일종의 토양 조성이다. 대기업 사장이건 대통령이건 어느 대단한 조직의 수장이 여성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 없는 분위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VRL 프로그램이 고안되었다. 여성들이 되도록 많이 투표하고 많이 출마하며 많이 리더가 되도록 의식화 운동과 함께 토론, 기금모금, 선거전략 등 전문분야 캠프도 운영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키겠다던 이 단체는 2013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2008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었다면 단체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백악관 프로젝트’는 사라졌지만 여권운동 진영의 숙원인 백악관 입성 프로젝트는 여전히 가동 중이다. 여성들이 투표하고 출마하고 이끄는 풍토는 그 사이 많이 정착되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역시 적어도 10년 전부터는 준비된 상태였다. 그가 발만 내딛으면 사뿐히 백악관 문턱을 넘을 줄 알았다.
그런데 8년 전 젊은 흑인 정치가의 ‘변화’ 물결에 무너졌던 그는 올해 사회주의 백인 노장의 ‘개혁’ 물결에 불안 불안하다. 버니 샌더스 유세장에서 환호하는 인파를 보며 클린턴 진영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은 여성들의 지지열기이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기치 아래 모든 여성들이 뭉쳐주기를 기대했지만 절반의 여성들은 힐러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힐러리는 미움을 많이 받아온 인물이다. ‘사람들은 왜 클린턴을 싫어하는 가’ 같은 칼럼들이 나올 정도이다. 객관적으로 싫어할 부분들이 있다. 이메일 스캔들, 월가와의 긴밀한 관계, 거액의 강연료 등의 문제로 정직성이 의심받고, 클린턴 가의 재집권에 대한 반감도 크다.
하지만 그가 미움 받는 근본적 배경은 상당부분 주관적이다. 너무 똑똑하고 야심만만하며 강한 여성에 대한 거부감이다. 남성이라면 ‘지도자답다’고 평가받을 자질이 여성에게는 ‘인간미 없다’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힐러리가 내세우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업무수행 능력뿐이어서 사람들이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힐러리를 변호하자면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제2의 여권운동 세대에게 ‘인간미’는 사치였다. ‘여성은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에 맞서느라 남성의 몇배 노력을 해야 겨우 능력을 인정받고, 그렇게 한뼘 한뼘 전진한 것이 그 세대의 산 역사이다. 살아생전에 여성 대통령을 보는 것은 그 세대의 크나큰 소망이다.
문제는 요즘 젊은 세대의 시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샌더스 지지 젊은 여성들은 특정 후보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후보의 성별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성평등이 실현되었다는 반증, ‘백악관 프로젝트’가 원하던 토양이 조성되었다는 말이 된다. 여권운동 측면에서 보면 환영할만한 변화, 하지만 힐러리에게는 타격이 되는 변화이다.
힐러리는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백악관 가는 길은 험하고도 가파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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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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