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중산층 인구 급락’, ‘몰락하는 미국의 중산층’-. 벌서 몇 년째인가. 이 같은 소리가 들려 온 게. 그 경고가 이제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없다’는 식의 단언으로.
관련해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성적 불능증세에 비유한 ‘재정적 불능증세’(financial impotence)란 말이다. 그 증세가 얼마만큼 만연돼 있으면 그 같은 신조어까지 등장했을까.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가욋돈이 필요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경우를 상정하고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는 설문조사를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일이 생겨 400달러를 지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47%,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는 그 경우 돈을 꾸거나 전당포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다는 대답을 했다. 절반에 가까운 미국인들이 단 돈 400달러의 여유조차 없다는 거다. ‘설마….’ 그렇지만 잇단 유사 설문조사는 하나 같이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한번 응급실에 실려 갔다 하면 최소 1000달러 정도의 비용이 든다. 38%의 미국인은 그 같은 경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한 조사는 밝히고 있다. AP 통신은 미국인의 3분의2가 비상금으로 1000달러를 비축하기 어렵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무엇을 말하나. 중하류 소득계층은 말할 것도 없다. 대졸이상의 학력에 연소득 10만 달러가 넘는 계층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돈에 쪼들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 성인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심각한 ‘재정적 임포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많은 이유가 제시된다. 그러나 크게 보면 한 가지로 귀착된다. 소득은 제자리걸음, 아니면 오히려 줄었다. 지출은 그런데 줄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각종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1967에서 2014년 기간 동안 미국 가정의 소득 추이를 보자. 이 기간 동안 상위 5분의1에 드는 가정의 소득은 극적인 증가를 보였다. 반면 나머지 계층의 소득은 완만한 증가를 보이고 만 것이다.
하위 5분의3에 드는 계층의 소득증가가 피크를 이룬 시기는 1999년과 2000년이다. 이후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결과적으로 중간 5분의1에 드는 계층, 다시 말해 전형적 중산층의 가계소득은 47년, 그러니까 근 반세기 동안 23.2%의 증가에 그친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따른다’-. 미국 사회의 불문율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소득은 오히려 줄었다. 뭐라고 할까. 미국 경제가 중산층을 배반했다고 할까. 미국 경제가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 한 가지, 생산성 제고라는 목표 하에. 미국의 중산층은 그 변화의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54%의 미국인은 재정적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있다. 돈은 넘버 1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그 결과 밤잠을 잘 못 이루는 등 건강문제도 일으키고 있다. 돈에 쪼들려 아예 의사만나기도 포기했다. 심리학협회가 밝힌 재정적 임포증세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다.
문제는 이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재정적 불안정성으로 사람들은 우울증에, 자신감 결여, 결혼생활 파탄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재정적 임포 증세는 미국의 국가적 질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재정적 임포증세는 미국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재정적 어려움은 환멸을 넘어 분노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 분노는 엉뚱하게 불법체류자 등에게 투영되면서 정치마저 변질 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수퍼 파워 로마제국이나, 영국은 미국과 다른 가치 자산을 지니고 있었다. 굳건한 중산층이 중요한 자산이란 개념은 없었다. 중산층은 미국만의 가치 자산으로 수퍼 파워 미국을 지탱하는 지주의 하나다. 그 중산층이 쇠퇴할 때 미국의 파워는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진단이다. 미국은 50년 주기로 경제, 사회적인 대변화를 겪는다. 그 50년의 한 주기로 스트랫포는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선출에서 카터 대통령시절까지를 잡았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부터 50년, 오는 2030년까지를 그 다음의 50년 주기로 보았다. 그러니까 레이건 혁명으로 시작된 50년 사이클이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또 다시 경제, 사회적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미국이 맞이할 최대위기로 중산층 위기를 꼽은 것이다.
과거 1950~60년대 미국은 ‘경제성장의 민주화’를 경험했다면 2010년대 미국은 ‘재정적 불안정성의 민주화’를 겪고 있다. 계속되는 지적이다. 다른 말이 아니다. 중산층의 삶은 좀처럼 향상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중산층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인가.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을 파시스트 통치로 몰아가고 있다는 경고가 괜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파시즘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대불황에 대한 퇴행적 반응이다. 트럼프의 득세는 어느 모로 보나 만연한 ‘재정적 임포증세’, 그에 따른 분노의 정치, 그 직접적인 결과로 보여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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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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