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던 ‘봄날은 간다’ 중에 나는 장사익의 노래가 제일 좋다. 낭랑한목소리로 구성지게 부르는 백설희가 원조이고, 작은 입에서 실을 뽑듯 소리를 뽑아 올리는 조용필의 리메이크도 좋다. 하지만 한복을 입고 한손에 부채를 든 채 심장에서 쥐어짜는 듯한 장사익의 무반주 노래가 제일 슬프다.
이 노래의 작사가 손로원은 원래 화가였다고 한다. 그는 6.25 전쟁 때 피난살이 하던 부산 용두산 판잣집에 어머니 사진을 걸어뒀다. 연분홍 치마에 흰 저고리 입고 수줍게 웃는 사진이었다. 사진은 판자촌에 불이 나면서 타버렸다. 그때 황망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곡이라고 했다.
나는 이태 전 5월 봄날, 지금은 세상 떠난 하형과 화개장터로 들어서며 이 노래를 들었다. 마음이 금방 아련해 왔다. 그런데 손바닥만한 장터는 옛 토속적인 멋은 간데없고 값싼 관광지 냄새만 진하게 풍겼다. 예전엔 구례 등지의 풍성한 농산물과 하동포구의 물 좋은 해산물이 모여들던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였다는데.
마을초입에는 천하대장군 대신 조잡한 노래비가 서 있다. 봇짐진 장사치들이 땀을 훔치며 걸었을 성황당 고갯길은 모두 깎여 삭막한 아스팔트길만 훤하다. 신새벽 산나물 소쿠리를 머리에 인 산골아낙네들을 실어 나르던 나룻배도, 강나루도 흔적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에서 양식 현수교가 높이 세워져 관광차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김동리는 단편소설 ‘역마(驛馬)’ 에서 화개장터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되었으니 벌써 근 70년 전 일이다. “그곳이 언제나 그리운 것은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육자배기....” 우리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옛 소설 속의 화개장터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장터 맨 갓집 식당의 의자에 걸터앉아 동동주와 은어튀김을 청했다. 짙은 화장을 한 젊은 아낙네가 연신 물고기를 튀겨내고 파전을 구워 한 상을 차려온다. 제법 따가운 한낮 볕 탓인지 동동주 한 모금이 그리도 시원할 수 없다. 여기오래사셨나요? 지나가는 인사치레였는데 아낙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길 쏟아놓는다.
“저는 강원도에서 역마살이 끼어 이곳까지 흘러왔지요. 남자 따라 어느 봄날 마실가듯 예까지왔는데 그에게 버림받고 장터에서 생계를 이어온 지 몇 년 되었답니다. 섬진강이 흐르듯 또 떠나야지요. 제게 붙은 역마살 때문에 어디론가 또 가야지요.” 역마살! 소설 역마는 역마살로 일컬어지는 당사주(唐四柱)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고 그 팔자소관에 몸을 맡기던 우리 선조들의 뿌리 깊은 운명관. 소설 속의 두 젊은 남녀도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역마살이 낀 천륜으로 체념하고 화개장터를 떠나지 않았던가. 어쩌면 세월가고 산천은 변해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되풀이되는 것일까?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 미국으로 떠나 40여년을 살아온 나도 역마살이 낀 팔자인지도 모른다. 떠날 운명으로 믿고 고향을 떠났는데, 이제 고향 그리워 다시 돌아온 이 마음도 역마살의 소치일까? 허나 어찌 나 뿐이랴! 이 따뜻한 봄날, 평생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곳 화개장터에서 서로 옷깃을 스치며 서성이고 있다.
아낙네가 청하지도 않은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른다. 옛 시절 장터에서 사시사철 흘러나왔다던 한 많은 춘향가 판소리 대신 제법 구성지게 부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역마살 낀 5월 봄날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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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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