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도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임에도 ‘국가’의 기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학설들 가운데 현대 국가이론의 출발점으로 가장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것은 17세기 영국 철학자 홉스의 ‘사회계약론’이다.
홉스의 이론은 고교시절 일반사회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시작된다. 자연 상태에서는 무질서가 지배한다. 인간들은 이런 야만적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사회질서를 만들고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홉스는 구성원들이 국가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는 이들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을 지켜주기로 계약을 맺었다고 봤다.
오늘날 국가와 국민의 관계만 살펴봐도 홉스 학설의 타당성이 확인된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번 귀한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낸다. 한국남성들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데 청춘기의 황금 같은 시간을 바친다. 국가 시책일 경우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고 손해가 되더라도 기꺼이 이에 따른다. 이 모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그 신뢰란 어떤 경우에도 국가는 국민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상호계약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기본적 믿음을 크게 뒤흔드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국가는 국민들을 제대로 지켜주고 있는가라는 회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2년 전 발생한 세월호 사건은 국가의 존재이유를 묻게 만들었던 참극이었다.
수백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사건도 마찬가지다. 어이없는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국가는 수수방관하고 방치함으로써 피해를 키웠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불리는 것은 두 참사의 본질이 똑같기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계약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국회에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 법안이 상정됐다. 당시 환경노동위 회의록이 최근 공개됐는데 일부 여당의원의 발언 내용이 충격적이다. “환경성 질환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만 특별보호해 주는 것은 교통사고와 범죄행위로 인해 상해를 입은 국민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교통사고와 동일시하려는 궤변과 억지가 놀랍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 교통사고라고 했던 망언이 떠오른다.
유해성을 숨긴 채 소비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제품들을 계속 팔아온 행위는 부도덕한 기업에 의한 사악한 테러다. 테러에 대한 대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해야 한다. 그런데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해온 정부는 미적거리고 외면했다. 그러는 사이 국민들의 귀중한 생명은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럼에도 일부 정신 나간 여당 정치인들은 여전히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기업과 소비자들 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테러는 테러범과 피해자들 사이의 문제일 뿐이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런 인식을 가진 정부와 정치인들일수록 국가의 품격, 즉 ‘국격’이라는 단어는 훨씬 더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면서 성과는 부풀리고 잘못은 축소하거나 감추기에 급급하다. 이런 행태를 지난 8년 동안 지겨울 정도로 봐왔다. 이들은 “안보는 보수정권이 잘 한다”며 마치 ‘안보’가 자신들의 전유물이라도 되는 양 내세운다.
그렇다면 안보란 무엇인가.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 영어로는 ‘security’다. 보수정권이 안보를 잘해 국민을 지켰다는 실증적·객관적 증거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무능 때문에 국민들이 생명을 잃거나 위험에 처하는 사례들이 훨씬 더 많이 쌓여가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철학이 빈곤한 지도자와 정치세력이 국민들로부터 위탁받아 경영하고 있는 국가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곪아 있다. 국가의 품격을 논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자격부터 되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