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12개 대회에서 11개 우승자 아시안 핏줄
▶ 미국 영토 개최 대회 33%가 아시아 기업 후원
한국 기업이 타이틀 스폰서를 맡은 JTBC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한 김세영이 한국 자동차 기업 로고를 배경으로 샷을 날리고 있다.
지난 200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 출신 원로 골퍼 잰 스티븐슨(호주)은 “아시아 선수들이 LPGA투어를 망치고 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스티븐슨의 발언은 큰 물의를 빚었다.
스티븐슨은 “LPGA 투어 선수가 가져가는 상금은 미국인의 돈”이라며 “나 역시 미국인이 아니지만, 미국 선수에게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굳힌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비하한 발언과 맞먹는 인종차별적 망언이었다. 스티븐슨은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LPGA 투어에서 비영어권, 특히 아시아 선수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이 엄존한다는 불편한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아시아 선수에 대한 차별 논란은 2008년 LPGA 투어가 비영어권 출신 선수를 대상으로 영어 시험을 치러 불합격하면 투어 대회 출전을 제한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다시 한 번 불거졌다.
거센 반발로 결국 영어 시험 방안은 백지화됐지만, 아시아 국가 출신 선수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널리 확산하는 기폭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LPGA 투어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선수들이 우승을 휩쓰는 바람에 미국에서 점점 인기를 잃어간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국내 골프팬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 왜곡된 시각을 증폭시키는 것은 LPGA투어가 갈수록 아시아 선수들의 잔치판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번 시즌에 치러진 12개 대회 가운데 5개 대회 우승 트로피는 한국 선수가 차지했고 한국 태생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2개를 가져갔다. 일본 국적의 노무라 하루도 우승컵 2개를 챙겼다. 또 한국인 부모를 둔 이민지(호주), 그리고 태국의 에리야 쭈타누깐이 각각 1승씩 챙겼다. 12개 대회 가운데 11개 대회 우승자가 아시안 핏줄인 셈이다.
미국 국적 챔피언은 혼다 LPGA 타일랜드를 제패한 렉시 톰프슨(미국) 혼자다. 국적이 미국이지만 LPGA 투어 인기 스타나 기대주 가운데 아시아계가 적지 않다.
스티븐슨이 아시아 선수가 LPGA투어를 망친다고 주장한 2003년 시즌에는 31개 대회 가운데 아시아 선수가 우승한 대회는 10개였다. 박세리(39·하나금융)와 캔디 쿵(대만)이 각각 3승씩 거뒀고 한희원(37)이 2승, 박지은(37), 안시현(32)이 각각 1승씩 올렸다.
아시아 선수의 활약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다.
스티븐슨의 주장이 맞는다면 아시아 출신 우승자가 훨씬 많아진 지금 LPGA투어는 망했어야 한다.
하지만 LPGA투어는 오히려 더 발전하는 중이다. LPGA투어는 지난 2008년 이후 금융 위기 여파로 크게 위축됐다.
2011년 대회는 고작 23개만 개최했다. 올해는 대회가 33개로 늘어났고 상금은 2011년보다 56%나 증가했다. 올해 LPGA투어는 작년보다 대회는 2개, 상금은 400만 달러가 늘어났다. 분명한 성장세다.
LPGA 투어가 금융 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다시 도약한 데는 아시아의 힘이 컸다.
미국 골프 칼럼니스트 랜들 멜은 최근 트위터에 “예전에 어떤 유명한 선수가 말하기를 아시안이 LPGA를 망친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가 LPGA투어를 구해냈다”고 썼다. 스티븐슨의 '망언'이 틀렸다는 것이다.
2011년 LPGA투어 대회 23개 가운데 아시아 기업이 타이틀 스폰서를 맡은 대회는 7개뿐이었다.
지금은 14개로 늘었다. 아시아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가 늘어난 덕도 있지만, 미국 땅에서 열리는 대회 18개 가운데 3분의 1에 이르는 6개가 아시아 기업 후원으로 개최된다.
한마디로 아시아 기업의 손길이 없었다면 LPGA투어는 고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LPGA 투어 마이크 완 커미셔너는 “2008년 이후 고사 위기에 빠진 LPGA투어를 구해낸 것은 해외로 눈을 돌린 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완 커미셔너가 말한 ‘해외’는 아시아 지역과 아시아 기업이다.
완 커미셔너는 “과거에는 아시아 선수에 대해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등 불만이 많았던 건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뛰어난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 LPGA 투어의 경쟁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고 NBC 방송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시아 출신 선수들이 LPGA투어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아시아 지역에서 LPGA 투어의 인기가 폭증하고 이에 따라 후원하겠다는 기업도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에 진입했다는 설명이다.
아시아 각국에서 LPGA 투어 중계권을 비싼 값에 산 것도 LPGA 투어에 큰 힘이 됐다. 아시아 선수가 늘어났고 다들 뛰어난 성적을 내기에 아시아 각국 방송사가 LPGA 투어 중계권 구매에 선뜻 돈을 낸다.
LPGA투어 마케팅 담당 존 포더니 이사는 “투어 수입은 2008년보다 60%가량 늘었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절반이 넘는다”고 밝혔다. 완 커미셔너는 “미국 경기가 또 나빠져도 예전처럼 투어가 쪼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시아 선수들이 영어에 서투르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박인비(28·KB금융), 최나연(29·SK텔레콤), 유소연(26·하나금융) 등 한국 선수와 쩡야니(대만), 미야자토 아이(일본) 등은 모두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에 응하고 프로암 파트너와 대화한다.
주니어 때 미국에 유학하거나 미리 영어를 익힌 뒤 미국에 건너오는 선수가 부쩍 늘었다.
13년 전 스티븐슨의 ‘저주’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아시아 선수가 LPGA투어를 망친 게 아니라 아시아가 LPGA 투어를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일본 기업이 후원한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에서 우승한 태국 선수 에리야 쭈타누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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