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대표적 부촌인 벨에어를 예로 들어보자. 남가주 주민 대부분은 아마도 평생 벨에어를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 갈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에 기준해 끼리끼리 모여 살다보니 소득 하위 ‘99%’가 최상위 ‘1%’와, 그것도 동네에서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법보다 강고한 ‘집값’이라는 장벽 앞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는 의미가 없다. 원한다고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20달러 지폐의 얼굴이 바뀌는 것이 이번 주 큰 화제가 되었다. 연방 재무부는 오는 2020년을 기해 지금의 앤드류 잭슨 대통령 얼굴을 뒷면으로 옮기고 노예해방 운동가였던 흑인 여성 해리엇 터브먼 얼굴을 앞면에 담는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재무부가 지폐도안 변경 계획을 발표하자 여성계는 새 지폐에 여성 얼굴이 들어갈 것을 강력히 제안했다. 2020년은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 보장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0달러 지폐에 여성을(Women On 20s)’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많은 여성들이 추천되고, 일리노어 루즈벨트, 로사 팍스 등 최종 후보들 중 터브먼이 선정되었다. 재무부는 여성계의 추천을 받아들였다.
백인남성 일색인 달러 지폐에 여성이, 흑인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미국 화폐에 여성이 잠깐 등장한 적은 있지만 일상적으로 늘 쓰이는 지폐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고, 흑인 얼굴은 건국 이후 처음이다. 흑인이자 여성인 터브먼이 선정됨으로써 지폐 상의 소수계 불평등은 한꺼번에 두 가지가 해결되었다. 미국사회의 진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상징성 또한 크다. 잭슨은 백인우월주의자로서, 터브먼은 흑인노예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잭슨은 인디언 토벌영웅이자 흑인노예를 부려 부를 일군 농장주였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해방에 앞장 선 여성이 노예소유주를 밀쳐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역사의 발전을 상징한다.
하지만 돈과의 인연이라고는 ‘결핍’밖에 없었을 터브먼이 지폐의 얼굴이라니, 그것은 아이러니이다.
터브먼은 대단한 여성이었다. 남부의 노예들을 수백명 북부로 탈출시켜 자유인이 되게 만든 ‘노예들의 모세’였다. 당시 노예탈출을 주도한 비밀조직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리더였던 퀘이커 교도 토마스 게렛은 “(터브먼이) 백인여성이었다면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칭송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1820년대 초 매릴랜드에서 태어난 터브먼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생활하다 20대 후반 ‘지하철도’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숨 쉬는 공기마저 맛이 다른 자유를 혼자 누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가족들을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 돈이었다. 노예 하나 도망가면 농장주들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 현상금을 걸었다. 그 삼엄한 경계와 추격을 뚫고 노예를 탈출 시키려면 위험한 만큼 ‘돈’이 필요했다. 돈이 있어야 자유를 살 수가 있었다.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호텔에서 일하며 ‘지하철도’ 경비가 마련될 때마다 매릴랜드로 내려가 부모형제를 비롯, 노예들을 탈출시키기를 13번이나 했다. 한번의 경비를 모으려면 수개월이 걸리니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쓸 수가 없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군에 합류했다. 간호사로, 조리사로 일하고, 정찰병이나 정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하철도’ 작전 덕분에 남부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던 그는 북군을 안내하며 군사작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는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돈이 필요했다. 자유인이 된 노예들,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느라 항상 돈에 쪼들렸다. 은퇴 후 그가 받은 연금은 월 8달러. 남북전쟁 참전용사였던 남편 사망 후 그 아내 자격으로 연금을 받았다. 터브먼은 그 자신 북군 소속으로 일한 데 대한 연금신청을 했다. 수년 걸려 겨우 나온 돈을 합치니 연금은 월 20달러, 이제 그의 얼굴이 새겨질 지폐의 액수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평등이 진짜 평등이 되려면 경제적 평등이 필수라고 말했다. 식당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해도 햄버거와 커피 한잔 살 돈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20달러 지폐에 흑인여성 얼굴이 들어간다고 평등 사회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의 장벽이 좀 낮아지는 것, 경제적 불평등 해소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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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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