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후 생긴 신조어들 가운데 ‘박적박’이 있다. “박근혜의 적은 박근혜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는 발언과 행위는 과거 그의 언행으로 반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반복하고 있는 자기모순을 꼬집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4.13 총선을 앞두고 자행된 여당의 이른바 ‘비박 공천학살’과 ‘진박 내리꽂기’를 놓고 또 다시 ‘박적박’이 회자되고 있다. 그는 6년 전 자신의 측근들이 공천에서 대거 배제됐을 때 이를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냈었다.
“사당화, 즉 공천에 사심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특정계파 입맛에 맞춰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권력이 정의를 이길 수 없다” 등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집권당내 공천행태는 6년 전 대통령이 작심하고 비판했던 그것을 그대로 닮아 있다. 아니, 훨씬 더 나갔다.
대통령에 찍힌 인사들은 가차 없이 내쳐지고 있다. 경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여론이나 유권자들의 신망은 전혀 아랑곳 않는다. 컷오프를 합리화하려 둘러대는 이유들은 궤변에 가깝다.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쓴 소리를 했던 인사들은 예외 없이 칼바람의 대상이 됐다. 한 때의 충성은 전혀 고려요소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대통령과 친박세력에 의해 내쳐지고 있는 인사들은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합리적인 보수’로 평가받고 있는 정치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공천파문의 중심에 선 유승민 의원이 그렇고 일찌감치 컷오프 된 진영 의원 역시 그렇다. 유 의원은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가 ‘배신자’로 찍히는 바람에 정치적 박해를 받아왔다.
진 의원은 박근혜 정부 첫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대통령이 대선 때 했던 기초연금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가 청와대와의 갈등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합리적 보수는 건강한 가치를 지향한다.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 공동체 합의, 그리고 점진적 변화와 전통 관습을 중요시 한다. 그러면서도 ‘다름’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인다. 힘과 순결에 집착하는 전체주의적 보수와는 다르다.
합리적 보수주의는 가치뿐 아니라 태도로도 극단적 보수와 구분된다. 아니다 싶으면 자기 진영 내에서도 할 말은 한다. 획일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리적 보수로 분류되는 여당 의원들이 다름을 용납 못하는 대통령에게 찍힌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합리적 보수의 도태는 정치인들 개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한국정치에도 불행한 일이다. 정치의 요체는 타협이다. 합리적이고 온건한 생각을 가진 정치인들의 층이 두터울수록 타협의 정치가 이뤄질 가능성은 높다. 강경파들이 득세하면 할수록 정치는 극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한쪽이 강경해지면 상대 역시 강경파가 자연히 주도권을 잡게 된다.
지금 한국의 정치가 꼭 그렇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극우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번 대선을 보자.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존 케이식은 전혀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합리적 보수는 점차 희귀종이 돼 가고 있다.
1970년대 공화당은 상당히 온건했다.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현재의 민주당 입장과 비슷했다. 그렇기 때문에 양당의 합의를 통해 거대한 사회적 계약과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보수의 가장 큰 적은 진보가 아니라 극우다. 앞으로 한국정치의 미래는 극단이 아닌, 합리적 생각을 가진 세력이 얼마나 세를 확장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는 어느 당이 이기느냐 못지않게 합리적 보수가 생환할 것인가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합리적 보수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은 정치 생태계와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그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권자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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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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