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돌산읍 향일암 뒤편 금오산에서 내려다 보면 지형이 거북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여수 밤바다’를 포기하고 돌산읍 향일암까지 내달렸다. 돌산은 여수에서 섬을 제외하면 가장 남쪽이고, 향일암은 돌산에서도 끝자락이다.
동백과 후박나무 잎사귀는 싱그러운 윤기를 머금었고 먼나무는 빨간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으니, 돌산의가로수는 긴 겨울이 무색하다. 그물망 뒤집어 쓴 ‘돌산 갓’도 푸르름을더해 아침저녁 영하의 기온에도 여수의 바람결엔 봄 내음 물씬하다.
노랑 하양 노랑, 돌산에서 만난봄 전령 3총사봄 찾으러 여수 갔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올라올 텐데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노루귀, 변산바람꽃, 복수초. 사실 그 봄이라는 게 과장을 좀 보태면 손톱보다 작은 것이어서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해도 보일락말락 하다. 봄바람에 스치는 온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고개를 내민 것들이니 그 정도 수고쯤이야.
돌산읍 끝자락 향일암을 약 5km앞둔 백포마을에서 봄소식을 전하는첫번째 전령을 만나기 위해 차를 세웠다. 포구를 낀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길을 잡았다. 오리나무 꽃술도 주렁주렁, 매화향기 상큼한 농로를 따라 밭이 끝나는 지점까지 발걸음이 가볍다. 숲이 시작되는 초입이 바로노루귀 군락지다. 군락지라고해서 온천지가 꽃밭일거라 기대하면 실망이크다. 잡목이 우거진 돌무더기 위로분홍빛 점들이 흩뿌려진 수준이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가녀린 꽃대는길어야 10cm 미만이고, 하나의 꽃대에 단 한 송이의 꽃을 달고 있다. 바람이 조금만 세져도 금방 스러질 듯한 모습, 그래서 더욱 반갑고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잎 모양이 노루의 귀를 닮아 붙은 이름인데, 잎은 온 정성을 쏟은 꽃이 제 목적을 달성한 후에야 나온다.
두번째 전령사는 변산바람꽃, 향일암을 바로 코앞에 둔 지점에서 도로오른쪽 언덕배기가 군락지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곳이어서 사진을 찍다가 밟거나엉덩이로 뭉개지 말 것을 당부하는안내문도 붙어 있다. 돌무더기 틈새로 톡톡 튀어나온 모습이 앙증맞고도 기품이 넘친다. 사실 꽃잎처럼 보이는 5장의 하얀 이파리는 꽃받침이고, 퇴화한 꽃잎은 암술과 수술의 가장자리에 노랗게 둘러져 있다. 작은꽃 하나에 흰색과 노랑, 파랑과 연두빛 작은 우주를 품었다.
여수에서 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변산 바람꽃이 먼저 발견된 건이곳 돌산인데, 최초로 명명한 식물학자가 부안의 변산반도에서 채집해발표했기 때문에 변산에 이름을 빼앗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돌산바람꽃’으로 불릴 뻔도 한 식물이니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욱 애정이 가는 봄 전령이다.
돌산의 세번째 봄 전령 복수초는 금오산을 중심으로 향일암 맞은 편율림치 산자락에 모여 터를 잡았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도로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군락지까지는 오르내린 발길에 자연스레 길이 생겼다.
하얀 눈밭을 뚫고도 솟아나는 복수초라 이미 활짝 펴서 꽃잎 끝이 말린것부터 초롱처럼 새로 망울을 터트리는 것까지 다양한 개체를 볼 수 있다.
노루귀와 변산 바람꽃에 비하면 꽃봉오리가 아주 큰 편이어서 무채색 겨울 숲을 노랗게 물들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복수초 군락 인근 율림치는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초록 기운 가득한 금성리 들판 너머 섬들에갇힌 다도해로 노을이 붉게 떨어진다.
장거리 여행으로 쌓인 심신의 피로도 잠시 내려놓는다.
원효대사가 세운 관음전으로 시작한 향일암은 구례 화엄사의 말사(末寺)다. 그럼에도 해를 품은 사찰답게일출의 기운을 받으려는 중생들의 발걸음으로 웬만한 대형 사찰 못지않게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절은 육지가 끝나는 바다에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 중턱, 스러지다 서로 의지하고 버틴 바위덩어리가내준 옹색한 공간에 터를 잡았다. 주차장에서 사찰까지 거리는 500m 남짓한데 쉬엄쉬엄 여유롭게 걸으면 20분은 족히 걸린다.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다.
돌산갓김치를 판매하는 식당 골목을 통과하면 향일암으로 오르는 2개의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은 계단이고 오른편은 계단이 없는 경사로다.
의무는 아니지만 방문객들은 암묵적으로 계단으로 오르고, 경사로로 내려온다.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계단(이곳 해설사는 398계단으로 설명한다.
방문객들이 알려 준 숫자를 평균 낸것이라니 정확하지는 않다)을 오르고올라 중턱쯤에서 해탈문을 지날 때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해탈문은 인위적으로 세운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 2개가 맞붙은 좁은틈이다. 성인 한 사람 지나기 알맞은 10여 미터 통로는 갈수록 좁아져‘ 마음이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지 못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돌산은 돌산이다. 향일암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중턱에서 해탈문으로 부르는 바위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나야 한다.
돌산(突山)은 돌산(石山)이다. 향일암에서 바위가 서로 기대 통로를 만든 곳은 이곳 말고도 여럿이다. 원통보전에서 관음전을 오르는 길도, 삼성각으로 나가는 통로도, 절간을 완전히 벗어날 때도 바위굴을 통과해야한다. 터가 좁은 만큼 절간 건물도 웅장하기 보다는 산자락에 폭 안긴 모양새다. 관음전 앞 안전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작은 거북모양 돌 조각은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칠 듯하다. 향일암 뒷산을 ‘금빛 자라’ 금오산(金鰲山)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상가가 밀집한 부분에서 앞으로 튀어나온 땅 모양이 영락없이 거북의 머리 형상이다. 향일암과 금오산에 널린 바위에서도 수많은 거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위가 깨진 단면이신기하게도 일부러 조각한 듯 거북 등껍질 문양이다.
거북 형상은 금오산으로 오를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등산로는 향일암에서 나오면 왼편으로 연결된다. 정상까지는 약 800m, 역시 20분을 잡는데 이 물리적 계산에도 가파른 경사도가 빠져있다. 미리 말하면 무릎관절이 좋지 않거나 심폐기능이 약한 사람이라면 포기하는 편이 낫다.
급경사로 시작한 길은 중턱에 이르러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제 계단으로 이어진다.‘ 정상까지 200m, 170m,70m…’ , 수시로 나타나는 친절한 표지판은 행군할 때‘ 이제 다 왔어, 힘내’라는 선임들의 격려만큼 얄밉다.
숨을 헉헉거리면서도 뒤돌아 본 풍경은 고단함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시원하다. 향일암 포구 뒤로 멀리 경남 남해로 연결된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거북머리 왼편으로 돌출된 지형은 마치 앞다리가 헤엄치듯 생동감을 더하고, 등산객은 어느새 거북 등에 올라 푸른 봄 바다를 항해하는 착각에 빠진다.
돌산에서 복수초는 한겨울에도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지금은 갓 피어나는 것 부터 활짝 핀 모습까지 볼 수 있다.
병산바람꽃은 타지역보다 가장 먼저 봅 소식을 알리기에 ‘돌산바람꽃’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잎 모양에서 이름을 따온 노루귀는 작 지만 기품이 넘쳐 이른봄 야생화를 찍 는 사람에게 가장 사랑받는 꽃이다.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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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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