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가는 곳마다 트럼프 이야기이다. 미국 선거에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더 이상 트럼프를 모를 수는 없게 되었다.“이러다 트럼프가 대통령 되는 거 아니야?” “미국이 수준이 있지, 설마 그렇게 되기야 하겠어?”라는 말들을 한다.
지난 가을만 해도 ‘기현상’으로 불리던 트럼프의 인기는 연말이 되면서 ‘트럼프 현상’이 되더니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되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높아졌다. 논란 많은 억만장자 트럼프가 ‘2016년 대선 공화당 후보’로 성큼성큼 다가들고 있다.
트럼프의 치솟는 인기를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TV 프로그램 엔터테이너라면 모를까 국가 최고지도자, 옛날식으로 하면 국부를 뽑는 일에 기본적품격과 자질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교양 없고, 예의 없고, 품위 없는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의 체면은 어찌 될까 싶은 우려도 있다. 그런 우려에 대해 그의 핵심 지지층인 저학력 저소득 백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체면이 밥 먹여 주나’하는반응일 것 같다. 트럼프를 대선 주자로 뜨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밥의 문제이다. 밥그릇을 누군가가 자꾸 빼앗아 가는 듯한 불안과 두려움, 반면 서민들 밥그릇 지키는 데는 관심도 없는 듯한 기성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 - 블루칼라 백인들의 심기는 불편할 대로 불편하고, 트럼프는 이를 연료삼아 지지층을 넓히고 있다.
30여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광활한 땅에 압도되었었다. 이렇게 넓은땅에 사니 사람들이 너그럽구나 싶었다. 인구밀도는 높고 소득은 낮던 당시 한국에서는 꿈만 같던 일들이 미국에서 현실로 일어나곤 했다. 예를 들어 유학생이 오면 대학 측은 배우자의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 그러다 배우자가 공부하겠다고 하면 배우자 몫의 장학금도 마련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회 분위기는 여유롭고 너그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건 대학을 졸업하건 직종만 다를 뿐 봉급은 비슷하게 받으면서 내 집 장만하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백인들의 경우이다.
지금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빡빡하고 팍팍하다. 2000년대 들어 9.11 테러가 발생하고, 아프간·이라크 전쟁이 터지고, 금융위기로 대공황에 버금가는 불황이 지속된 후 미국의 중산층 특히 백인 서민층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큰돈은 월스트릿이 차지하고, 일자리는 이민자들이 차지한다는 박탈감이 심각하다. 거기에 자신들을 대변해주어야할 정치권은 돈 눈치, 표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같으니 이들의 좌절감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때 트럼프가 쇼맨처럼 등장했다. 아무 것도 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미국이 잘못 가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외침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동아리 의식이 그 안에 있다. 일부 백인들 가슴속에 내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어떤 불편함을 트럼프는 속 시원하게 건드려주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 흑인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 정치인들을 옭아매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발이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은 범죄자들이다, 불법체류자 다 내쫓고 장벽을 쌓겠다, 무슬림은 입국 금지해야 한다는 등의 과격한 말에도 지지도가 흔들리지 않는이유이다. 다른 정치인들처럼 눈치 안보고 화끈하게 할 말 다 하니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이다.
“트럼프가 정치 경험은 없지만 2만명 직원 거느리며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해왔으면 능력은 있는 것아닌가” “이제까지 자질, 품격 따지며대통령 뽑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였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 … 트럼프 지지자들은 말한다.
두려움과 분노의 시대에 등장하는것이 선동가이다. 가장 대표적 선동가는 히틀러였다.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선동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오래도록 혹독하게 치렀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최근 트럼프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가볍게 넘길말이 아니다.
2016년 대통령 선거가 걱정스럽다. 증오와 분노가 표의 향방을 정하고 있다. 트럼프가 좋아서가 아니라 기성 정치권이 싫어서, 샌더스를 반드시 지지한다기보다는 힐러리가 싫어서 표를주는 식이다. 분명한 사실은 올 연말이면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고, 그의 비전과 정책에 따라 앞으로 우리의 4년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민자의 나라로서 미국의 가치를 존중하는가,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가가 우리에게는 일차적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야 하겠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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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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