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근길에 NPR 방송을 켜니 진행자가 반가운 사람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35살의 수학교사 앤소니 염, 염승환 씨였다.
저소득층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이스트 LA의 링컨 고등학교에서 어렵기로 유명한 AP 미적분 시험 만점 학생이 나와서 화제가 된 것은 지난달 말이었다. 이어 그 반 학생 21명 전원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 화제가 되더니, 이 모두가 어느 열정적 교사 덕분이라고 해서 주목을 받은 청년이 바로 염 교사이다.
AP 미적분 만점은 대통령이 반길 정도로 대단한 뉴스이다. 지난해 5월 실시된 이 시험에는 전 세계에서 30만2,500여명이 응시했는데 그중 만점은 단 12명, 이중 미국 유일의 만점자가 링컨 고교 학생이다.
미국에서 이 과목 만점자가 나온 것은 지난 2013년 이후 처음이어서 오바마 대통령은 당장 학생을(교사 혹은 부모와 함께) 백악관에 초청하기로 했다. LA 통합교육구로서는 완전 경사였다. 미셸 킹 교육감이 직접 학교로 찾아가 염 교사에게 감사편지를 전했을 정도이다.
염 교사 이야기에는 기분 좋은 감동이 있다. 한인학부모라면 절대로 자녀를 보내지 않을 학교에서,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을 아이들을 보듬고 그 아이들의 머릿속에 수학의 재미를 심어주고 마침내 AP 만점 혹은 통과의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교사의 헌신적 사랑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1988년 영화(‘Stand & Deliver’)로도 만들어졌던 제이미 에스칼란테 교사. NPR 진행자가 같은 이스트 LA의 가필드 고교에서 같은 미적분을 가르쳐 AP시험 합격을 이끌어냈던 에스칼란테를 언급하자 염 교사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 사람은 전설이지요. 나는 그냥 보통사람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 보통사람인 우리 2세들이 떠올랐다. 보통사람으로서 보통이 아닌 성과를 이뤄낸 그가 어떤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녀가 성공대열에서 뒤질세라 ‘공부, 공부’ 하며 일단 내몰고 보는 부모들에게 그가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에 그는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복권 맞은 느낌”이라고 했다. 자신보다 실력 있는 교사들이 많이 있다며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추첨에서 뽑힌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말 그대로 보통사람이다. 한국에서 5학년 마치고 LA로 이민와서 낯선 미국학교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고, 영어가 무서워 말을 못하던 보통아이였다. UC 어바인에서 경제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던 보통청년이었다.
그런 그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어머니였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 그게 네가 잘 하는 거라면 일이 잘 풀리지 않겠니?”
생각해보니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았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도 가정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 일이 참 재미있었다. 그래서 UCLA 대학원에 들어가 수학교육을 전공하고 링컨 고교에 부임했다.
하지만 그가 꿈꿨던 교사와 현실의 교사는 천양지차였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사가 말을 하면 아이들이 경청은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을 만큼 깊은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는 ‘비법’을 찾았다. ‘교사’의 자리에서 내려와 ‘친한 형 (오빠)’이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때로 우스꽝스런 행동도 불사하며 거리감 없이 지낸지 11년. 그는 이제 학생들에게 교사이고 멘토이며 형이고 삼촌이다. 신뢰감이 형성되고 나니 아이들은 그가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한다. 5년째 AP 미적분 시험 전원 합격의 비결이다.
그는 말한다. “이 일이 너무 좋은데, 돈까지 받으면서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의 아메리칸 드림 성취이다.
1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안착’이다. 돈 모아서 집 사고 아이들 교육 잘 시켜 이 땅에 번듯하게 뿌리내리는 것이다. ‘뿌리’ 위에서 시작하는 2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가지를 뻗는 것, 자기실현이 되어야 하겠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자신이 가장 잘 할 일을 찾아서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자면 가장 좋아하는 일, 그래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일을 찾는 것이 순서이다. 좋아하면 최선을 다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면 겉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면 남을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화가 가능하다. 염 교사가 링컨 고등학교에서 이뤄낸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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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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