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출퇴근길은 교통체증 잔혹사.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열도 받고 도도 닦는다. 그런데 그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 안에 위안이 되는 게 하나 있다. 법 앞에서도 평등하지 못한 만인이 트래픽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당장 멈춰버릴 듯한 고물차도, 집 한 채 가격인 호화 자동차도 다만 자기 순서를 기다릴 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벤츠라고 먼저 가고 고물차라고 나중 가는 법은 없다.
우리 삶에서 만인이 평등한 도로는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누구나 달리고 싶은 도로, 성공가도나 출세가도 같은 도로에서 평등은 없다고 관련통계들이 합창을 하고 있다. 사람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서 불평등하게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이 여러 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조사는 며칠 전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 지난 수십 년 사이 계층이 대물림되면서 계층 고착화 현상이 일고 있다는 내용이다. 부모가 고학력이면 자녀도 고학력, 아버지 직업이 전문직이면 아들도 전문직, 아버지가 단순노무직이면 아들도 단순노무직으로 대를 잇는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떠하든 다음 세대는 같은 출발점에서 같은 조건으로 달릴 수 있어야 계층이동이 가능한 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연구진은 부모세대의 지위가 자녀 세대의 지위와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조사 대상자를 3세대로 나누었다. 산업화 세대(1940~59년생), 민주화 세대(60년~74년생), 정보화 세대(75년~95년생)이다.
그 결과를 보면 산업화 세대의 경우 봉급수준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변수는 학력이었다. 본인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나오면 좋은 직장을 잡았다. 민주화 세대가 되면서 본인의 학력과 더불어 부모의 학력이 변수가 되더니, 정보화 세대에는 부모의 학력에 더해 경제적 배경이 봉급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고난 능력이나 노력보다 가정환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과거 가난한 수재들의 대학이었던 서울대학에서 가난한 학생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 서울대 신입생 3명 중 한명은 부자동네, 강남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금수저 흙수저의 수저 계급론인데, 이것이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자본의 힘은 극대화하고 빈부격차는 날로 벌이지는 시대에 비슷한 현상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 ‘수저론’이 있다면 미국에는 ‘출생 로토’라는 말이 있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가 평생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는 말이다.
대표적 연구로 하버드에서 실시한 기회 균등성 프로젝트가 있다. 미전국의 100대 카운티 청소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조사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보면 나이 26세가 되자 이미 소득 격차가 확연하다. 전국 26세의 평균소득과 비교해 부촌 출신은 15% 높은 반면 빈민촌 출신은 17%가 낮았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라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존스 합킨스 대학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내놓았다. 볼티모어 지역 학생 800명을 1학년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추적한 조사이다. 출신 가정의 경제력은 학력으로 바로 이어졌다. 대학 졸업률이 저소득 가정 출신은 단 4%, 고소득 가정 출신은 45%에 달했다. 고학력은 고소득으로 이어지고 계층은 대물림 된다. 아울러 부잣집 출신이 별 노력 하지 않아도 부자로 사는 비율이 가난한 집 출신이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하게 사는 비율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 1970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1만7,000명을 조사한 결과도 비슷하다. 이들이 42살이 되었을 때 내려진 결론은 가난한 집 수재보다 부유한 집 둔재의 성공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자동차에 비유한 어느 역술인의 글이 있었다. 타고 나기를 벤츠로 타고나면 길이 험해도 거침없이 잘 나가고, 소형 티코로 타고나면 작은 돌부리만 있어도 비틀거리게 된다는 말이다. 역술인다운 운명론이다.
그런데 사회과학적 연구 결과가 ‘운명론’이라면 그런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사다리를 차근차근 올라가면 누구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다는 희망, 계층 이동의 꿈이 살아 있어야 건강한 사회이다. 날로 벌어지는 빈부격차, 깊고 깊은 경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책이고 정치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한 가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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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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