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6일에 Universitty of Mississippi 는 미시시피 주의 주기를 건물에서 내려놓기로 결정하였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얘기요?” 라고 말하거나 “그것이 무슨 뉴스거리냐?” 라고 질문하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남부의 주립대학이 주의 기를 영구적으로 내려놓는 것은 역사적인 중요한 행사인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남북전쟁 중의 남부국인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는 그들의 국기가 있었다. 또 남부국에 속했던 주들은 주기에 남부국의 상징을 주기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남부 주들 중 유일하게 주기에 아직도 남부국의 상징을 포함시키고 있는 주가 미시시피 주라면 주기 하양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짐작하시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맥락에서 사실은 더 놀라운 뉴스도 있었다. 2015년 12월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주청사에 미합중국 (USA) 국기와 함께 남부국 (CSA) 국기를 게양해 왔다고 한다. 남부국 국기는 국기이기 때문에 게양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유물로써 게양해 왔다는 변명과 함께 … 지금은 남부국기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정확하게 150년이 되는 2015년에야 항복의 상징으로 주기와 국기가 하양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남북의 진정한 화합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독자들 중에는 남북전쟁 중 격전지였고 남북분열의 시발지 라고 할 수 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조지아 주 등의 미국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허어, 이 사람들은 미국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네” 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미국에는 미국사람이라는 것이 없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외국인들은, 미국의 남부는 문화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조금 낙후한 지역으로 오해하는 수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남부사람들이 단정하고 있는 북부는 “뿌리도 없는 벼락부자들인 ‘조금 상스럽고’ 주로 상공업, 무역, 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Yankee 라는종족”이 살고있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조금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미국사람들은 다 Yankee 인 것으로만 알고 있던 필자는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스럽고 혼동되는 경험이었다.
1963년에 유학생으로 북쪽인 로드 아일랜드 주에 왔던 필자는 피부로 느껴지는 인종차별을 별로 경험하지 않았었는데, 같은 해에 조지아로 유학왔던 필자의 아내는 버스정류장의 화장실에 White 와 Colored 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처음 보고 순간적으로 황당하게 느꼈다가 White 쪽의 화장실을 썼으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5년에 아내가 버지니아에서 학교친구들인 백인학생들과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학생과 같이 식당에 갔었는데, 식당종업원이 흑인이라고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V.P.I.라고 제법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버지니아 공과대학이 있는 Blacksburg 이라는 캠퍼스 타운에서 있었던 일이다. 같이 갔던 백인학생이 지배인에게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항의하자 지배인이 사과를 하면서 음식주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은 거의 모두가 노예이었던 남북전쟁 전의 미국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이 부지하 세월 전에 불법화 된 이후인 1965년의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었다. 법률과 제도는 바꿔질 수 있으나 인간의 뿌리깊은 편견과 전통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로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
“백인은 우월한 인종이고 흑인은 열등한 종족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해 낸 것이다.” 라는 소리를 학교에서도 듣고 교회에서도 듣고 아버지에게서도 듣고 자신도 자기 아들에게 같은 말을 전해주면서 꾸준히 살아오는 동안 인종차별은 골수에 박힌 진리가 되어버려서, 학대 받아 오던 흑인들조차 인종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도 어렵고 힘든 종류의 것들은 당연히 흑인 몫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면서 살아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 나오는 백인 주인공들은 흑인들에게 배다른 형제에게
가지는 것과 같은 친족애를 가지고는 있으면서도 뼛속에는 빼놓을 수 없는 골수를 가진 것같은 백인우월주의자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저자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은 흑인들에게 마치 친권이라도 가진 것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로써 흑인들이 “Uncle Tom” 으로 있을 때에나 주인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진 친근감을 느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소설에서 얻은 엄청난 저작수입에서 흑인 의과 대학생들의 장학금으로 큰 액수의 돈을 내놓았으나, 그녀의 선행이 사랑에서라기 보다는 동정에서 나온 자선사업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였다. 물론 흑인들에게 동정심 조차도 없는 백인들이 훨씬 더 많은데 미국의 뿌리 깊은 문제의 원인이 있다.
북쪽에서는 “수소탄으로 미제국주의자들과 함께 너희도 없애주갔어!” 라고 으르렁 거리고 남쪽에서는 군인들에게 북한에 있는 한 핏줄의 형제들이 동포가 아니라 “주적”이라고 훈련시키고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인 필자는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을 감히 비평할 자격이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시대이던지, 어느 곳에서 이든지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든 꼭 있게 될 남북통일 후의 한국이 남북전쟁 후의 미국보다 더 화목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필자는 솔직히 “글쎄요” 이상으로 정직하게 대답할 자신이 현재로는 없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노예해방 이후에도 남부에서 살았다. 노예해방을 생명을 받쳐가며 관철시킨 북부 주들이 종전후 흑인들의 대거 북부이주를 환영하지도 않고, Freed Men’s Bureau 등 이외에는근본적인 대책이 없는채로 노예들은 해방되었던 것이다. 해방된 노예들은 실직보험수당도 없는 사회에서 다시 백인농장주 밑에서 임금을 받는 농업노동자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의 백인들이 점차 남부정권을 재장악하기 시작하고 북부에서도 급과파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흑인들의 인권문제 역시 차츰 제2선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공화당과 연방정부에서도 남부의 차별정책의 재등장을 방관하기 시작하였다. 또 한 가지 더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이 시대의 미국 대법원의 역사 역류적인 판결들이었다.
미국 정치 역사 에서 미국 대법원이 공헌한 진보적 역할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정도로 적극적인 것으로서 대부분 행정부와 입법부의 생각보다 앞선 것들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대법관들의 생각이 행정부나 입법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연방대법관은 한번 임명되면 종신토록 근무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까닭에 한 세대 전의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90대 노인들이 대법관들로 몰려있던 기간들도 있었다. 남북전쟁 종전후의 연방대법원이 보수적인 대법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던지 흑인문제들에 대한 시대 역행적인 판결들을 내놓았었다.
남북 전쟁전에는 흑인들의 인간이하적인 처우가 문제이었지 실직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예해방은 흑인들을 자유스럽게는 만들었으나 동시에 대량 실직자로 만들었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주던 노예주들이 없어진 것이다. 아주 심각한 정치.사회. 경제적인 문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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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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