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보던 중 정겨운 그림 한장이 눈길을 끌었다. 서양 어린아이가 무릎 꿇고 앉아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 바로 ‘ 오늘도 무사히’ 그림이다. 한국에서 자란 중년 세대라면 가족사진보다 자주 본 것이 이 그림이다. 택시를 타면 반드시 걸려있고,버스 운전석이나 이발소 벽에도 종종걸려있었다.
18세기 영국화가 조수아 레이놀즈가 구약의 사무엘을 모델로 그린 작품‘어린 사무엘’인데, 한국에서는 ‘오늘도 무사히’의 주인공으로 우리와 친숙하다.
나이가 들수록 ‘오늘도 무사히’의무게를 느낀다. 그 작고 조악한 그림을택시 운전석 앞에 걸면서 그 가족이함께 걸었을 간구의 무게를 젊어서는헤아리지 못했다. 대단한 행운도, 대단한 성공도 아닌 그저 무사함이 얼마나감사한 일인지를 살아갈수록 느낀다.
생로병사의 삶은 기본적으로 지뢰밭이어서 그날이 그날 같은 무료함을 불평하다 보면 어느 방심한 순간 발밑에서지뢰가 터진다. 올 연말에도‘ 무사함’의호사를 누리지 못하는 이웃이 주변에여럿 있다.
10여년째 12월 들어서기 무섭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오던 분이 올해는소식이 없었다. 취재를 하느라 만난 후이분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크리스마스카드로 안부를 전해왔다. 남편이 신장 이식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어서 남편 병간호는 물론 생계까지 책임지느라몹시도 고단한 삶을 사는 분이다. 60대중반의 나이에 한순간도 쉴 틈이 없으니 ‘병이 난 게 아닌 가’ 마음이 쓰이던 중 그분의 전화를 받았다.
LA 다운타운에서 25년째 해온 비즈니스를 갑자기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입주해있는 건물이 팔려서가게를 비워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건물주가 그동안 렌트비를 올리지 않아서 그나마 가게를 운영했는데 지금 다른 곳으로 가면 렌트비를 감당할 수 없어 그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환자 병수발이 우선이고 가게 운영은 뒷전이어서 수입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주 수입원이던 일을 놓으려니 앞이 캄캄했을 것이었다.
“남들에게 이런 일들이 닥칠 때는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어요. 내게도 닥친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25년간 정든 공간을 떠나는 아쉬움,앞으로 살아갈 막막함으로 한동안 심란했지만 이제 많이 진정이 되었다고그분은 말했다.
지난 한달 사이 40대, 50대의 젊은죽음도 있었다. 지난달 한국의 가족 중한사람이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 그남편과 딸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지인의 40대 딸이 세상을 떠났다. 무남독녀를 먼저 보낸 노부부는 단장지애(斷腸之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늘 거기 있던 아내, 늘 거기있던 딸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캄캄함이 우리의 삶 중에 일어날 수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 ) 같은 것, 매일손님들이 찾아든다. 일상을 깨지 않는조용한 손님들만 오면 좋으련만 때로는예기치 못한 불청객들이 들이닥친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느닷없이 감원을당하고, 오랜 세월 잘 살던 부부가 갑자기 원수지간이 되어 이혼을 하고, 누구보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이 암 진단을 받는 등 고통과 절망의 손님들이삶의 모퉁이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곤한다. 고통도 슬픔도 모두 삶의 일부이니 견디며 살아낼 수밖에 없다.
‘무사함’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가진것에 만족한다는 의미가 된다. 높고 화려한 것을 쫓던 눈을 돌려 가진 것의소중함을 본다는 의미이다. 그 상태로거기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소유 보다존재에 무게를 두는 마음, 그래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밭이다.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은 어느모로 보나 후진국이지만 한가지에서는단연 선두이다. 국민의 행복을 기준으로 평가할 때 부탄은 세계 1위 선진국이다. 국민들의 마음의 밭이 세계에서가장 비옥하다는 말이다. 2015년 조사에서 부탄 국민 중 ‘행복하다(지극히행복 8.4%, 많이 행복 35%. 약간 행복47.9%)’는 사람은 91.2%, ‘불행하다’는사람은 8.8%에 불과했다.
국민소득 2,000달러 남짓한 그 나라에서 무엇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겠는가. 국내총생산(GDP) 대신 국내총행복(GNH)을 국가성장 지표로 삼는 통치철학 덕분이다. 소유 보다는 존재에 집중하면서 무사하게 하루 하루살아가는 데 만족하는 소박한 삶의 모습들이다.
가슴 졸이고 애태운 많은 순간들을거치며 우리 모두 2015년의 끝자락까지 왔다. 오늘도 무사하기를, 앞으로 한해 또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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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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