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하는 청춘남녀는 우선 첫 대면에서 눈이 맞아야한다. 그 관문을 통과한 뒤 연인관계를 굳히려면 눈보다 마음이 맞아야 한다. 신문도 그렇다. 행인들은 가판대에서 1면 머릿기사가 마음에 드는 신문을 골라서 산다. 하지만 그 사람을 고정 독자로 만드는 건 1면 기사가 아니라 안쪽에 실린 사설이다. 1면이 신문의 얼굴이라면 사설은 마음, 곧 심장이다.
지난 5일 심장이 얼굴에 붙어서 나온 신문이 화제가 됐다. 미국은 물론 세계적 권위지로 꼽히는 뉴욕타임스다. 원래 모든 신문사설은 본판(메인 섹션)의 끝에서 두세 번째 페이지에 게재되는 게 통례인데 그날 뉴욕타임스 사설은 1면으로 튀어나와 상반부의 왼쪽 3분의1을 점유했다. 물론 편집자가 실수한 게 아니다. 사주가 작심하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
툭하면 심장이 얼굴에 붙는 신문이 있기는 하다. 북한 정부기관지인 노동신문은 김일성 3대를 우상화하는 사설을 뻔질나게 1면에 싣는다. 한국 신문들도 중대 이슈에 관한 사설은 곧잘 1면에 모신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1면에 사설을 게재한 것은 1920년 이후 95년 만에 처음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날 뉴욕타임스 인터넷 판의 접속수가 하늘을 찔렀다.
사설 제목은 ‘총기 유행병’(인터넷 판은 ‘총기 유행병을 끝장내라’)이었다. 오른쪽 톱기사에는 ‘FBI, 샌버나디노 총격사건 테러행위로 수사’라는 통단제목이 달렸다. 사흘 전 LA 동쪽 샌버나디노에서 무차별총격으로 14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당한 대량학살 사건이다. 앤드류 로젠탈 논설주간이 450여 단어로 쓴 이 사설은 간결 명쾌하면서도 톤이 강력하다.
“양식 있는 사람은 모두 슬퍼한다”는 말로 시작한 사설은 “순식간의 대량학살을 위해 특수 고안된 전투용 무기를 민간인이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능욕이며 국가적 수치”라고 지적했다. 이어 “총기소유 권리를 보장한 제2 수정헌법을 들먹일 것 없이 세상엔 무제한적 권리도 없고, 합당한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도 없다”고 강조했다.
사설은 또 정치인들이 총격사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면서도 대량학살용 무기를 규제하려는 기본적 대응조치마저 반대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직 품위 있는 국민임을 보여주려면 대선기간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말로 사설을 마쳐 “국민의 생명보다 돈줄인 총기산업의 영리를 앞세우는” 정치인들을 내년 선거에서 도태시키도록 독려했다.
뉴욕타임스 발행인 아더 술츠버거는 이날 별도 성명에서 “총기 유행병에 속수무책인 미국의 무능력에 대한 좌절과 번뇌를 더 강력하고 더 가시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1면 사설을 게재했다고 밝히고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이슈가 뭐냐?”고 성토했다. 뉴욕타임스는 그 이전에 총기규제 관련 사설을 15 차례나 연속 게재해왔다.
뉴욕타임스의 마지막 1면 사설은 1920년,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 워렌 하딩의 낙선을 위해 게재됐다. 그 사설에서 “존경스러운 오하이오의 2류 정치인”이라는 야유를 받은 하딩은 예상외로 압승을 거두고 2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알래스카를 방문했다가 폐렴과 삼장마비가 겹쳐 임기를 못 채우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다.
미국인은 10만명 당 3.55명꼴로 총에 맞아 죽는다. 이웃 캐나다는 0.49명, 유럽국가 중 최악인 포르투갈도 고작 0.66명이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는 사실상 제로다. 약 20년 전 총기규제법을 강화한 호주에선 그동안 대량살상 사건이 한번도 없었다. 미국에선 대형 총격사건이 터질 때마다 총기매출이 급증한다. 총기규제에 관한한 미국은 까마득한 후진국이다.
한 세기 전 1면 사설에서 헛다리짚은 뉴욕타임스는 이번 1면 사설에서도 구름을 잡는 격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총기소유 옹호론자이고 힐러리 클린턴은 총기업계를 휘어잡을 담력이 없어 보인다. 총기 유행병을 근절시키는 대통령은 워싱턴, 링컨, 루즈벨트 등과 어깨를 겨룰만한 위인으로 추앙받겠지만, 내 생전에 그런 대통령을 보는 건 연목구어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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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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