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 쿵쾅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 웃는 소리 … 식구가 너덧 되면 집안은 조용할 틈이 없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따라붙으니 집안은 크고 작은 소리들로 그득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두가 바뀌기 시작한다. 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아이들이 자라 집을 떠나면서 각자 자기 몫의 소리를 챙겨간다. 그리고 배우자마저 세상을 떠나면 집안에 소리는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한 집안은 고요하다. 걸려오는 전화도,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은퇴하고 혼자 사는 많은 노인들의 현실이다.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노인이 있다. 지난달 28일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그를 ‘찾은’ 사람이 2주만에 4,000만 명을 넘었다. 독일의 최대 수퍼마켓 체인 에데카(EDEKA)의 크리스마스 광고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지금 전 세계를 돌고 있다.
광고의 주인공은 크리스마스에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 독일 광고에 미국, 한국, 영국 … 세계 각지 사람들이 모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 것은 노년의 ‘독거’와 ‘고독’이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 며느리 손주들에 둘러싸여 다복한 노년을 보내던 시대는 갔다.
광고에서 노인은 한평생 성실하게 살고 노후를 맞은 것 같다.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이다. 자녀들도 잘 자라 모두 대도시에서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고 있다. 너무 바빠서 고향에 홀로 사는 아버지를 방문할 틈이 없는 것이 문제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집안에서 모처럼 정적을 깬 것은 “올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못 가요”라는 전화 메시지뿐. 노인은 앞집 이웃이 반갑게 자녀들을 맞는 광경을 창가에 서서 묵묵히 지켜본다.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낸 게 이미 몇 년째. 노인은 텅 빈 식탁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삼남매는 갑작스런 소식에 충격을 받는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이다. 자녀들은 부랴부랴 검은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집에 도착하는데, 그들을 맞은 것은 장례식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만찬이다. 가짜 사망소식을 전한 노인이 웃으며 등장한다. “이렇게 안하고서야 어떻게 너희들을 모두 불러 모을 수 있었겠니?”후회와 자책으로 괴롭던 자녀들은 안도하고 고요하던 집안은 오랜만에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로 그득하다. 광고는 노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외로움을 조명함으로써 전 세계인의 가슴을 찌르고 있다. 나의 문제 혹은 내 어머니/아버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길어진 노년, 그만큼 깊어진 고독이 노인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이번 광고를 계기로 나온 영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한달내내 아무 하고도 이야기 하지 않고 지내는 노인이 100만명에 달한다. 65세 이상 연령층의 1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미국도 한국도, 미국 내 한인사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드는 손님이 단절과 고립이다. 사회활동하며 맺었던 모든 관계들은 은퇴와 함께 끊어지고,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성인자녀들은 일에 매여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 그런 현실을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지만, 고독감에 스포트라이트가 확 비쳐질 때가 있다. 명절이다. 추수감사절, 성탄절, 설날을 홀로 보내는 노인들이 한인사회에도 적지 않다. 노인 아파트나 은퇴 커뮤니티에 사는 경우, 자녀들이 찾아오고 모셔가는 이웃들과 비교되면서 혼자 지내는 고독감은 한층 강하게 엄습한다.
LA 다운타운의 노인아파트에 80대 초반의 여성독자 한분이 산다. 그분도 지난 추수감사절을 홀로 보냈다. 2남1녀 모두 “제 앞가림 잘하고 살아서 감사”하지만 얼굴 한번 보기는 쉽지 않다. 뉴욕에 사는 딸과 뉴저지에 사는 아들은 너무 멀어서 방문하지 못하고, 남가주에 사는 아들은 한달이면 3주 출장을 간다. 일하랴 자녀들 키우랴 저마다 사정들이 있으니 노모를 보고 싶은 것은 마음뿐 행동이 따르지를 못한다.
독일 광고의 노인처럼 이분도 명절을 가족 없이 보낸 지 여러 해다. 늙으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명절에 혼자 있으려면 사실 좀 쓸쓸하다”고 그분은 말한다.
노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시간’이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다. 가사와 육아, 직장 일에 쫓겨 사느라 시간이 없는 것이 30대 40대의 문제이지만 노부모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시간이 없다.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여기 계시는 게 아니다.
“노년이 되고 보니 성공한 자녀 둔 사람 보다 효자 둔 사람이 제일 부럽더라”고 한 지인이 말했다. 혼자 사는 어머니/아버지의 성탄절이 너무 고요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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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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