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ddeus Stevens 하원의원
Thaddeus (태디우스)Stevens 는 폴란드 계통의 가난한 부모의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Thaddeus 가 어렸을 때에 가출하여 행방불명 되었고, 홀어머니는 아들들을 키우며 교육시키느라고 어려웠다고 한다. 출생할 때부터 그의 형은 양쪽 발이, Thaddeus 는 한쪽 발이 뒤틀린 (club foot) 불구자로 태어났다. 이런 증세는 유전적인 것이 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부모들이 남모르게 저지른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사람 들은 믿었다고한다.
이 선천적인 불구때문에 Thaddeus 는 평생 발을 쩔뚝거렸다고 하는데 어려서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아 그 신체적인 불구가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그가 일평생을 약자들을 위해서 비정상적 이라고 여겨질만큼 투쟁 해왔던 이유가 바로 자신이 어려서 부터 체험해온 약자들의 소외감을 승화시켰던 까닭이라고 보기도 한다.
Thaddeus는 미국 정치인들 중 ‘이상한 사람’이라고 불리어 지기도 하는데 링컨의 연설이 항상 부드럽고 친화감을 주었던 것에 비하여, 그의 반대자들에 대한 독설은 아주 매섭고 차가워서 공포감을 주었다고한다.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그가 ‘milk ‘대신 ‘sour milk’ 를 먹고 자란 탓이라’고 비꼬 기도 하였다고 한다. 재판 중에 그의 변호사로서의 변론 태도를 못마땅하게 본 판사가 “변호인은 항상 그렇게 냉소적이오?” 라고 힐문하자 그는 “아니오. 나는 지금 나의 냉소성을 숨기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오.” 라고 받아 넘겼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뉴햄프셔 주의 명문 다트머스 칼리지를 다녔는데 2학년 때에 최우등생이 었으나 회원의 추천으로 가입하게 되어있는 fraternity 인 Phi Beta Kappa 에 가입하지 못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졸업식 때에는 졸업생 대표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University of Vermont 법대를 나온 후 잠시 교사를 하다가 펜실베니아 주의 변호사 면허를 받아서게티스버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그는 개업 초기에 도망간 흑인여자 노예가 잡혀서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만든 재판에서 주인을 변호하여 승소했던 것을 가장 후회했다고 하는데, 그후 경관으로부터 부당한 폭행을 당한 후 그 경관을 살해한 사람을 그의 변론으로 무죄로 석방되게하자 그의 변호사업은 성업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입이 많아져서 얼마 후에는 게티스버그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을 가진사람이 되었으며, 그 인근에 몇 개의 철 용광로 공장도 소유하였는데, 남북전쟁때 남부군들이 그의 공장을 파괴하였다고한다.
한때 상당한 액수의 부채를 젔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파산법을 이용하여 채무를 탕감받지 않고 부채를 다 갚았다고 한다. 아마 그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었던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도시인 랭카스터 로 옮겨가 변호사업을 계속 하였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도서관이 귀했던 그 시절에 그는 자기의 서재를 무료로 일반인들에게 이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점차 정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랭카스터에서 신망을 얻었던지 파산위기에 있는 사립학교를 관리해 줄 것을 위탁 받은 후 기부금 등을 모으고 정부의 교육비도 배정받아 학교를 재활시켜 지금의 게티스버그 칼리지로 성장하게 하였다 한다.
Whig 당, Know Nothing 당등에서의 활동으로 정치 기반을 얻었고 1854년에 공화당이 창당되자 입당하면서 주의원이 되었다. 주의회에서 무료공립학교 설립 등을 주장하였다. 링컨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그의 선거운동도 도와주었다. 그는 크게 눈에 띌 정도로 반노예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underground railroad를 통하여 흑인노예들의 도주를 도왔던 듯하다. 그가 살던 옛집을 수리하려고 하던 중 지하터널이 그 집의 지하실과 연결되어 외부로 빠져 나갈 수 있게된 것이 발견되었다.
그는 얼마 후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반남부, 반노예주의자의 성분이 강력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는 하원의 운영위원장이 되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는데 남북전쟁 중에는국채 등의 발행으로 링컨의 전비조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점차 반남부정책의 과격파가 되어갔는데, 상원의 Charles Sumner 의원과 함께 자주 링컨을 백악관으로 방문하여 노예해방선언을 하라, 종전 후의 남부처벌 정책을 발표하라는등의 압력을 넣어가며 급진 과격 강성 정책론자가 되어갔고, 종국에는 급과파의 총지휘자격이 되었다.
화해와 점진적 정책을 추구하던 링컨 대통령과는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링컨이 선거정책 상의 이유로 “남부정치인” 앤드류 존슨을 제2기 선거 때의 부통령후보로 선택하자 “미국에 그렇게 인물이 없어서 남부, 민주당원인 존슨을 지명하였느나” 고 항의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선거 때에는 Lincoln-Johnson ticket 를 도왔으나 링컨과 더이상 상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링컨이 암살 된 후 장례열차가 랭카스터를 지나면서 유해를 모시고 추도식이 있었으나 Thaddeus 는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 링컨의 전기 저자 Carl Sandberg 에 의하면 그는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장례 열차가 떠나자 모자를 벗어 예의를 표했다고한다.
하원에서는 노예해방을 규정한 미국헌법 13번 개정이 통과되도록 하였으며 또 법안통과에는 실패하였으나 그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과격법안 중의 하나에는 종전 후 200 acres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남부백인 7만명의 땅을 몰수하여 해방된 노예들에게 오두막집 한채와 함께 40 acres 씩을 나누어 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런 제안은 당시의 국민정서보다 너무 앞선 것이었다고 한다. 이 토지 개혁법안은 Karl Marx 에게도 감명을 주었던 것인지 그의 저서 Das Kapital에 Thaddeus 의 농지분배안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링컨 암살 후에 앤드류 존슨의 종전 후의 정책이 링컨의 통치이념에 반동하는 것 이라고 확신한 Thaddeus 는 드디어 Johnson 대통령의 탄핵결의를 하원에서 통과시키고 몇의원들과 함께 상원의 재판에 “탄핵검사” (manager라고 불리는 직책으로 검사적인 역할을 하는 직책) 로 앞장섰다. 그때 늙고 병약해진 그는 상원에 이동식 병자침대에 실려 나와서 써가지고온 탄핵사유를 다 읽지 못하고 절반은 서기가 대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존슨은 한표 차로 탄핵파면을 면했었다. Thaddeus 의 급과파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차후 더 자세하게 설명할 생각이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사망하기 20여년 전부터 Lydia Hamilton Smith 라는 혼혈 여자흑인을 데리고 살았었다. 두사람이 어떤 관계이었느냐에 대한 이론이 분분하다. Lydia에게 보낸 Thaddeus 의 한장 남은 편지에 Lydia 를 Mrs. Smith 라고 호칭한 것도 쉽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Lydia 가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피부가 Lydia 보다 더 검은 아이였기 때문에 두사람이 연인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는 역사가들이 있다.
Thaddeus가 사망 했을때에 그의 조카, Lydia, 흑인 수녀 두 명, 친지 몇사람등이 임종하였다. Lydia에게는 유산 5,000달러나 종신연금 500달러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고 가구중 아무것 이나 원하는것을 갖도록 유언하였다. Lydia 는 Thaddeus 사후 그의 집을 사서 살았고 자기의 유산으로 Thaddeus 의 묘소를 관리하도록 하였었다. Thaddeus를 매장했을 때에는 랭카스터에 있는 그 공동묘지에 흑인이 한사람만 매장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후에 흑백이 다 묻히는 공동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Thaddeus 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순교자적인 흑인옹호가에서 남북전쟁 종전후의 정치혼란을 초래한 사람이라는등 다양한 것이라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까지는 그를 “과격파”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역사가들이 많았었는데 1950년대 이후에는 그를 인권운동 (civil rights) 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에서 극단적인 주장들과 분열속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소위 ‘역사바로쓰기’ 주장자들이 참고해 볼만한 미국역사의 한토막이다.
Thaddeus 는 76 세로 1868년에 사망하였다. 끝까지 자기의 신념을 꺾지않고 투쟁하다가 떠나갔다. 그런데 그의 진면목은 사후에 정당하게 평가된 듯하다.그의 관은 흑인들과 백인들이 같이 운구하였다고 하며 국회의사당 rotunda 에 안치되었는데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 링컨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그런 예우를 받은 것이었는데 하원의원으로서는 첫 번째 그 예우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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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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