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어떤 희열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다. 단순한 기쁨이나 대견스러움을 넘어서는 감격의 경지 같은 것이다. 겨우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에 온갖 말을 다 하고, 신기한 마음에 영어 몇 마디 가르쳐 주면 그 또한 외워서 척척 영어로 말을 하면, 부모는 흥분한다. “내 아이가 혹시 천재/영재인가?” 싶어 지레 영재교육의 어려움을 고민하기도 한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다. 맏이인 내 밑으로 남동생이 셋 있는데, 둘째 동생이 어려서 ‘영재’의 의심을 받았다. 첫째 동생이 3학년일 때였다. 둘째 동생은 학교 문전에도 가지 않았는데 제 형이 산수 숙제를 하다 틀리면 바로 잡아주곤 했다. 누구도 그 아이를 붙들고 산수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형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보며 저 혼자 배운 것이었다.
우리 4남매가 성인이 된 후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둘째 동생을 보며 엄마는 말씀하시곤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커서 대단한 인물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자라고 보니 별게 없더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라던 60년대 중반 한국에서는 김웅용 군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놓고 비슷한 꿈을 꾸었을 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 들어서며 한국에는 또 다른 신동이 등장했다. 5살에 곱셈, 7살에 미적분을 풀더니 8살에 대학에 입학해 화제가 된 ‘천재소년’ 송유군(18) 군이다. 내년 2월이면 한국 최연소 박사 기록을 세울 것이라던 그가 최근 논문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천체물리학 저널에 발표된 송 군과 지도교수의 공동연구 논문을 미국 천문학회가 ‘표절’로 판단, 학회저널 게재를 철회했다. 이로 인해 졸업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송 군의 내년 박사학위 취득은 무산되었다.
송 군은 이제 막 18살이 되었다. 11월27일 생이다. 대학 1학년이거나 대학입시 준비 중일 나이이다. 동년배에 비해 7~8년은 앞서 있는 그가 왜 표절 판정을 받을 무리수를 두었을까.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최연소 대학 입학’ ‘최연소 박사’ 같은 기록에 대한 집착이다. ‘천재’ 꼬리표에 걸맞게 뭔가를 빨리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클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의 부모가 부모로서의 욕심에, 학교는 학교 홍보를 위해 그를 무리하게 스타로 만들려 한다는 비판이 늘 제기되어 왔었다.
바이올린 연주의 거장 이츠하크 펄먼(70)이 며칠 전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다. 평생 이 사회에 기여한 업적을 토대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음악 ‘신동’에서 자유훈장을 받기까지 그가 음악인으로서 성공적 삶을 산 비결은 ‘천천히’인 것 같다. “연습은 항상 천천히 해야 한다. 무엇이든 천천히 배우면 잊어버리는 것도 천천히 하게 된다.” 고 그는 말하곤 했다.
그는 ‘천천히’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다리가 마비된 그는 5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3살이던 1950년대 말, 미국 최고의 인기 TV 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면서 바이올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다리를 저는 연주자의 길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목발을 짚고 무대까지 가는 것도, 무대 위로 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계단이 많으면 갈 수가 없어서 멀리 멀리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발 한발 몸으로 나아가면서 그의 음악도 함께 깊어진 것 같다.
지난 8월로 70세가 된 그는 현재 70살 기념 세계 순회공연 중이다. 2주 전에는 서울에서도 공연을 했다. 바이올린 연주자에서 교수로, 지휘자로 활약해온 그는 16번의 그래미상, 3번의 에미상에 더해 국립예술 훈장도 받았다. 음악인으로서 이룰 만한 것을 다 이룬 지금 그에게는 여전히 목표가 있다. 항상 처음인 것처럼 연주를 해서 도무지 지루해지지 않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최연소’ ‘최초’에 집착하는 조급함에 아까운 재능들이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날개가 꺾일 수 있다. 60년대의 신동 김웅용씨는 불투명한 10대를 보낸 후 지방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지방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 빛나던 ‘천재’와는 거리가 있는 이력이다. 그가 ‘신동’ 회오리에 휘말리지 않고 천천히 단계를 밟아 나갔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다.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달리기는 기록 세우고 나면 끝나지만 인생은 한두 번의 반짝 기록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장구한 세월이 이어진다. “내 아이가 아무래도 영재 …” 같은 부모는 아이의 먼 미래를 생각했으면 한다. 아이가 ‘신인상’ 보다는 ‘평생 업적상’을 받게 도와야 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래서 오래 가는 것이 삶을 사는 지혜이다.
<
권정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