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월가의 주가 폭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은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경제 재앙으로 꼽힌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한 것은 물론 히틀러의 집권을 도움으로써 제2차 대전의 간접적 원인이 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호경기와 불경기는 늘 반복돼 왔다. 그런데 어째서 1929년 찾아온 불경기는 단순한 불황이 아닌 ‘대공황’으로 발전한 것일까. 경제학자들은 무엇보다 1913년 생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의 잘못된 대응을 꼽는다. 주가 폭락으로 불안해진 사람들이 돈을 찾으러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리자(bank run) 고객이 맡긴 돈의 일부만 보관하고 나머지를 대출해 이자로 먹고 사는 은행들은 돈을 내줄 수가 없었다. 은행은 줄줄이 문을 닫고 돈줄이 막힌 기업들은 뒤를 이어 줄도산 하고 말았다. FRB가 돈을 풀어 은행들을 살렸더라면 기업들도 살았을 것이고 줄도산과 대량 실업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당시 대통령이던 허버트 후버는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임금 삭감을 하지 말 것을 기업에 요청했고 균형 예산을 목표로 세금을 올렸다. 의회는 의회대로 스무트 홀리 법안을 통과시켜 관세를 높이는 등 보호무역 장벽을 쳤다. 많은 세금을 물게 된 고소득층이 돈을 쓰지 않아 물건이 안 팔리는 판에 상대국의 보복 관세로 수출 길도 막히고, 임금 삭감을 통한 경비 절감도 안 되게 된 기업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007년 부동산 버블 붕괴와 함께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가 제2의 대공황으로 가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난 것은 대공황 전문가인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이때의 교훈을 살려 마음껏 돈을 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대공황은 고아로 어렵게 자라난 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백만장자가 되고, 1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의 고아를 돕는데 앞장서 ‘가난한 자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후버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오랜 호황의 부산물인 주식 버블과 그 붕괴, 그리고 FRB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은행과 기업의 줄도산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 때 백악관에 앉아 있었다는 죄로 후버는 대공황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고 아직까지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도 후버와 같은 대통령이 있다면 누굴까. 아마도 김영삼이 아닐까. 1954년 27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그는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초산 테러를 당하고 1979년 YH 여공들을 감싸다 최초로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됐으며 1983년에는 당시로서는 최장기 단식투쟁을 벌여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하나회 척결, 금융 실명제 실시, 전두환, 노태우 구속 수감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며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임기 말인 1997년 태국 바트화 폭락을 시발로 시작된 동남아 금융 위기는 한국을 최악의 경제난으로 몰고 갔으며 그의 이미지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사실상 한국판 대공황인 ‘IMF 사태’는 정경유착으로 대규모 부실 대출을 받은 한보 부도로 시작됐으나 이는 한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80년대 말부터 외환위기 직전까지 한국은 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은행 돈을 빌려 사업을 늘리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는 인식에 젖어 있던 기업들은 너도나도 남의 돈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다.
‘IMF 사태’는 오랜 기간 쌓이고 쌓였던 과잉 대출과 투자가 동남아 외환 위기와 맞물려 터진 것이지 이것이 김영삼 하나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어떤 의미에서 김영삼은 후버보다 더 억울하다. 후버는 주가 폭락 후 3년여의 시간이 있었지만 김영삼은 위기가 터진 후 별로 손도 못써보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 김영삼이 지난 주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퇴임 후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늘 바닥을 기어왔지만 그가 한국 발전에 끼친 공이 과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훗날 사가들이 인정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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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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