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시내에는 마더 이매뉴얼 AME 교회라는 유서 깊은 흑인교회가 있다. 1816년에 설립돼 200년 간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교회이다. 노예들이 세운 노예들의 교회, 노예반란 음모를 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처형된 ‘불온’한 교회,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서며 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요람이 된 교회 … 인종문제에 관한한 미국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교회에서 5개월 전 또 다시 ‘인종’ 참극이 벌어졌었다.
지난 6월17일 밤 교회 지하층에서 수요 성경공부를 마친 교인들이 백인우월주의 청년의 무차별 총격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청년이 쏘아댄 70여발 총탄은 담임목사를 포함, 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1살의 백인청년은 이들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개인적 원한이 있을 수가 없다. 청년은 갑자기 들이닥쳐 총을 쏜 것도 아니었다. 교인들과 한시간 쯤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는 거사를 감행하듯 총을 꺼내들었다.
체포된 후 그는 범행 동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인종전쟁을 일으킬 목적이었다고 했다. 유색인종을 이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확신에 찬 증오범죄였다. 그에게 참회의 기색은 없었다.
이매뉴얼 총기난사 사건은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했다. 사건의 참혹함에 미국사회는 경악했고, 불과 며칠 후 희생자 가족들의 입에서 나온 ‘용서’라는 말에 전율했다. 수백년 질기게 이어져온 인종차별, 인종증오의 악령이 다시 한번 미국사회를 분노와 분열로 들끓게 만들려던 순간, ‘용서한다(I forgive you)’는 세 마디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폭발 직전의 용광로 같던 분위기를 일시에 잠잠하게 만든 ‘용서’의 의미를 시사주간지 타임이 이번 주 특집으로 다루었다.
타임이 희생자 9명의 유가족 그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을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용서’는 합의된 내용은 아니었다. ‘용서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사건 발생 이틀 후 총기 난사범에 대한 보석심리 중이었다. 판사가 유가족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를 잃은 한 여성과 아내를 잃은 남성이 ‘용서’를 말했다. 범인을 향해 “너는 내게서 너무도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내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너를 용서한다.”고 했다.
매스컴은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참극’은 순식간에 ‘은혜’의 장으로 바뀌었다. 인종전쟁 대신 흑백이 손에 손을 잡는 화합의 장이 펼쳐지고, 주정부는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오래 논란이 되어온 남부연합기를 즉각 각 청사에서 내렸다. ‘용서’의 효과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가족들에게 이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데, 용서라니… 아직은 용서를 말할 때가 아니라며 분개했다. 게다가 이것은 사적인 원한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원죄로 인한 역사의 문제라는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용서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반발했다. 어머니를 잃은 딸들이 ‘용서’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는 또 다른 아픔도 생겼다.
용서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가족을 잃는 참극은 극히 예외적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일, 어떤 대상 때문에 고통 받으며 고통을 삭이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용서할 수 없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당장 찾아드는 것은 분노. 분노가 제때 해소되지 않고 쌓이면 독이 되어 몸과 마음의 병을 만들어낸다.
용서는 분노의 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고차원의 방어기제일 수 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상대방을 용서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이매뉴얼 교회에서 아내 마이라를 잃은 앤소니 톰슨은 용서란 ‘상처가 잘 아물도록 벌어진 상처부위를 붙잡아주는 반창고’ 같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8학년 교사로 오래 일한 그의 아내는 자녀들이 성장하고 난 후 신학을 공부해 목사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려던 중이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예비한 삶을 살아가려면 가능한 한 빨리 용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70세의 어머니를 잃은 나딘 콜리어는 유가족 중 가장 먼저 ‘용서’를 말했다. 증오는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라며 용서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고 했다. 총기 난사범에 대한 처벌은 사법 시스템에 맡기고 개인적 증오에서는 벗어나겠다는 의지이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것이 용서다.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 때문에, 그에 대한 분노 때문에 스스로의 삶이 지옥이 되곤 한다. 용서는 일종의 정화작용이다. 마음속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실망을 털어내는 작업이다. 감사의 계절을 앞두고 마음의 대청소가 필요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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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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