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 입에서 나온 말 같은가. 요즘 대한민국을 둘로 쪼개 놓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한 역사학자들의 성명서나 야당 대변인의 논평처럼 들린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대표시절이던 지난 2005년 국회 신년연설에서 한 말이다. 아무리 10년이 강산도 변하는 긴 시간이라 해도 지금 박 대통령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정화 강공드라이브 발언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신의’와 ‘원칙’을 브랜드로 하는 정치인이 어떻게 이처럼 자신의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이런 자가당착이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을 비판하려면 그의 과거 발언을 뒤지기만 하면 된다”는 조롱까지 나오겠는가. 국정화 논란이 국제사회까지 알려지자 뉴욕타임스는 “아베 정부가 교과서를 이용해 근대 식민역사에 대한 은폐와 국수주의적 시각으로 일본 청년들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수차례 비판해 온 박근혜 정부는 유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논리학에서는 이치에 딱 들어맞지 않는 주장이나 이론을 ‘곡론’이라고 한다. 곡론에는 궤변과 왜곡, 그리고 모순이 가득하다. 올곧은 주장을 의미하는 ‘정론’의 반대말이다. 자신이 한 말을 완벽하게 부정하면서 다른 논리로 이를 정당화하려 드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곡론이다. 이것이 바로 ‘자가당착의 곡론’이다.
논리학자들은 공익보다 이념과 사익이 우선할 때 자가당착의 곡론을 서슴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할 때 이전의 말과 입장을 번복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된다. 이것은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표를 얻는데 톡톡히 도움을 줬던 공약의 상당수를 별다른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파기해 버렸다.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인들의 나쁜 습성으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또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과 사고가 날 때마다 마치 자신은 당사자가 아닌 옵서버인양 진단을 내리고 꾸짖는 유체일탈 어법으로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왔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는 가끔 신념들끼리, 혹은 신념과 실제가 부딪히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생각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인지부조화’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인지부조화가 생기면 이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려 들게 된다.
정치인들이라고 평생 한 가지 입장만 가지고 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시류와 상황에 따라 입장은 얼마든 달라지고 변할 수 있다. 간혹 너무 바뀌면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럴 경우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라도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필요하다면 사과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생각과 입장이 바뀔 수는 있어도 그것이 너무 손쉬운 일이 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그런데 번복을 반복하는 대통령에게서는 이런 겸연쩍음이나 고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원칙의 정치인’ 박근혜에게 말 바꾸기는 자동치 기어 바꾸는 것만큼이나 쉽고 간단한 일인 것 같다.
멘탈이 강한 것인지 기억력이 짧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 편리해 보이는 사고방식이 부럽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다. 자가당착과 자기모순에 따른 인지부조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자연히 이로 인한 스트레스도 별로 없다.
이런 황당한 사례들을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무수히 보고 겪게 된다. 하지만 일개 평범한 개인이 아닌 대통령이 이런 곡론에 빠지는 것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곡론은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데 그치지만 대통령의 곡론은 국민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국격을 멍들게 하니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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