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아시나요? 내가 속한 ‘버클리 문학’ 산행 때 앞서가던 종훈 선배님이 주위를 돌아보며 묻는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초가을 들녘에 흐드러진 야생꽃들을 내려다본다. 무엇일까? 따스한 햇볕일까? 촉촉한 안개비일까?바람이에요. 바람은 꽃들을 흔들어 깨웁니다. 춤추게 합니다. 꽃은 정물(靜物)이 아니에요. 운동을 해야 사는 생물입니다. 바람의 손길에 휘둘리지 않는 꽃은 향기도 맵시도 나지 않아요. 나는 농부의 아들이어서 잘 압니다.
그렇다. 꽃을 흔드는 것이 바람 풍이다. 바람 풍(風)자 속엔 곤충(蟲)이 들어있다. 나비와 벌과 같은 벌레들이 찾아와 꽃을 흔들고 생육해야만 생명력이 있다. 사랑하고, 번식하며, 그 여정가운데 좌절하고 세파에 흔들린 꽃들만이 자신의 향기를 뿜는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중략) 순이의 꽃밭은 잘 있을까? 문득, 늘 풍성하던 그녀의 밭이 생각났다.
순이와 데이빗은 우리부부와 30년 지기다. 옛 얘기지만, 내가 미국서 막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잡은 첫 직장이 와이오밍주였다. 그리고 수년 후, 북동지구 환경책임자로 부임한 곳이 쉐리단이란 소도시였다. 인구 3만의 전형적인 백인 부촌. 광활한 목장과 글로벌 명성을 지닌 광산과 유전들, 그리고 빅혼 산맥을 끼고 절경의 휴양지들이 산재한 미국의 심장 같은 곳이었다.
그 외딴 곳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 순이였다. 초대받은 집안에 들어섰을때 무쇠난로에서 붉게 타던 화력의 훈훈함. 그 위에서 보골보골 끓던 된장찌개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꽃과 열매들이 가득하던 뒷마당 텃밭의 풍성함에 취했었다. 남편 데이빗은 나와 동년배로 노천광산의 불도저 기사였다. 독실한 신자인 그들은 우리를 친 형제처럼 반겨주었다.
순이는 꽃밭의 인연을 털어놓으며 수줍게 웃었다. 파주 어느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학교 꽃밭을 만들려고 인근 미군부대에 도움을 청했다. 그 때 소형불도저를 타고 나타난 이가 데이빗 상병이었다. 순진한 소년 같은 그는 작업이 끝났는데도 염치없이 매일 찾아왔다고 한다.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우리는 쉐리단에서 3년을 더 살다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하루도 못 보면 탈이라도 나듯 거의 매일 만났던 순이네 부부, 일곱살에서 기저귀찬 아기까지 그들 아들 삼형제와 함께 우리 가족은 송별 식탁을 마주했다. 훗날 아이들이 크면 다시 만나자고 기약 없이 헤어졌다. 간간히 소식은 주고받았지만, 30년 세월이 영화자막의 한줄 바람처럼 흘러갔다.
지난 여름 은퇴 후에야 와이오밍을 다시 찾게 되었다. 석양 무렵인데도 순이는 꽃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작은 농장만큼이나 널찍한 밭에서 고추며 호박이며 많은 작물들도 키워냈다. 나도 농부의 딸이라 힘들 때 밭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데이빗이 후두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수년 동안, 두 부부는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는 야생화처럼 서로를 기대고 이겨냈다.
큰 아들은 공군소령이 되었고, 기저귀를 찼던 두 아들들은 스프링 크릭 노천광산에서 각각 채굴과 광산복원 부장들이 되어 활기차게 살고 있었다. 덥썩 포옹해오는 그들의 등짝이 넓고 따뜻했다. 데이빗은 암을 극복하고 아들 부서에서 최고참 불도저기사로 아직도 땀을 흘리고 있다.
덤으로 받은 생명이 이리도 고마울 수가 없다고 했다.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오늘 아침 순이네가 보낸 고추며, 무우, 호박까지 한 궤짝 소포가 왔다. 바람의 향기가 싱싱하게 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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