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이 지닌 힘은 아주 강력하다. 어떤 하나의 상징이 머리에 박히면 그것은 생각과 의식을 지속적으로 지배한다. 21세기 들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이념전쟁이 ‘프레임’ 싸움이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누가 어떤 프레임을 집어넣느냐가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은 프레임 전쟁의 승리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된다.
복지를 둘러싼 논쟁 역시 이런 양상으로 진행돼 왔다. 그리고 복지의 폐지와 축소를 내세우는 보수는 프레임 싸움에서 진보보다 전반적으로 우세를 보여 왔다. 그 중심에는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 교묘한 상징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미국 보수에 가장 큰 재미와 전과를 안겨준 복지이슈 관련 상징은 단연 ‘웰페어 여왕’(welfare queen)이다. ‘웰페어 여왕’은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들고 나왔던 상징이다. 수십개의 가명을 이용, 정부로부터 허위로 복지혜택을 받으며 캐딜락을 몰고 다닌다는 가공의 흑인여성이다.
레이건은 복지가 얼마나 악용되고 세금이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 강조하기 위해 ‘웰페어 여왕’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위대한 커뮤니케이터’로 불리는 레이건의 입을 통해 나온 상징은 진실인 것처럼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었다. 레이건 시대 이후 유례없는 부자감세와 복지축소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수습 불능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린스턴대 앵거스 디턴 교수의 발언을 놓고 현재 한국에서는 한바탕 왜곡 논쟁이 일고 있다.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보수언론은 디턴 교수가 “불평등이 성장의 동력이 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그의 저서 ‘위대한 탈출’의 한국어 번역판 서문을 쓴 한 보수학자는 디턴 교수를 불평등 비판론자인 ‘21세기 자본’의 토마 피케티 교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를 불평등 옹호론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자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일부 내용의 왜곡을 들어 판매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처럼 일부 몰지각한 보수는 근거 없는 상징과 교묘한 왜곡을 통해 끊임없이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든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웰페어 여왕’이라는 상징의 의도는 간단하다. 웰페어 수혜자들은 게으르고 근로의욕이 없는 ‘세금도둑’이라고 낙인찍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난한 것은 개인이 못난 탓이라는 이미지도 투영시킨다.
하지만 가난이 개인의 노력부족이나 능력 탓만은 아니라는 건 이미 밝혀졌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복지혜택은 자립을 도와준다는 사실도 속속 확인되고 있다. 지난 달 MIT 연구진은 멕시코 등 7개 국가의 저소득층 지원프로그램을 조사해 본 결과 이런 복지가 수혜자들의 근로의욕을 저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정부지원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낙오자’ ‘잠재적 범죄자’ ‘마약 중독자’ 같은 부당한 낙인이 찍혀 있다. 콜로라도 주 빈민들이 일시 현금보조를 신청할 경우 먼저 마약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와 유사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주는 20개가 넘는다.
동물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 ‘콘트라프리로딩’(contrafreeloading)이란 게 있다. 많은 동물들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먹이보다는 직접 찾아서 먹는, 즉 조금 수고로운 방식으로 먹이를 얻는 걸 더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동물도 이럴진대 ‘일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복지를 악용하고 남용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천문학적 재산을 가진 재벌들도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욕심내는 판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제 발로 서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들에게 약간의 복지는 희망이자 구원의 손길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들에게 부당한 낙인부터 찍으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가 아니다.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